누가복음서의 율법과 삭개오 > 성령치유 예수피 보혈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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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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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21장3절4절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인 새로운피조물 고백기도

 

나는 영생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사탄을 정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나는 믿음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되었습니다.나는 거룩한자입니다.

나는 모든것을 탁월하게 할수있는 은혜가 있습니다.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며 하나님의 생명과본성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영생은 나의것입니다.의는 나의것입니다.

죄를 죄거함은 나의것입니다.구원 구출 해방 자유는 나의것입니다.

치유와 신성한건강은 나의것입니다.형통은 나의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권세를 가지고있습니다.나는 아가페 사랑을 할수있습니다.

나는 지혜가 있습니다.나는 상황을 바꾸며 항상 승리하는자입니다.

나는 내인생의 선지자입니다.나는 영혼구원자이며 킹덤빌더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사 우리를 영광스런 아버지 나라로 데려가십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개혁)킹덤빌더교회목사 이상열목사 

                                                                                     

                       기독교신앙상담:이상열목사 010-3438-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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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치유 예수피 보혈 권세

누가복음서의 율법과 삭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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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킹덤빌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134.114) 작성일16-02-09 19:03 조회386회 댓글0건

본문

누가복음서의 율법과 삭개오

누가복음서의 삭개오 단락은 전통적으로 죄인의 회개 를 나타내는 단락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것은 잃어버린 자 및 억눌린 자 에 대한 누가 기자 특유의 관심을 삭개오의 직업에 연결시켜, 본 단락 역시 잃어버린 자의 구원 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정한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삭개오가 회개를 하고 있다고 할 만한 단서를 제시해 주지 않고 있으며, 삭개오가 회개한 후 보상의 결심을 말하는 것으로 학자들이 해석한 19:8이나, 예수가 그의 구원을 선포한 것으로 파악한 19:10은 그들의 주장을 지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삭개오 단락은 예수와 죄인이 교제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의인 의 전형인 삭개오를 내세워 그들을 반박함으로써, 이 교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즉 19:10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것 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라는 전통적 번역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깨어진 교제 (to. avpolwlo,j)를 찾아 회복시키러 (sw/sai) 온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해석은 누가복음서가 단지 예수 시대의 사건만을 보도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누가공동체라는 대상을 고려하며 저술한 것이라는 전망 하에서 가능하다.
소위 죄인 과 함께 하는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를 정죄하는 바리새인의 준거틀이 율법 이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들은 식탁교제의 문제를 주로 외부 공동체와의 대립 양상으로 받아들였으나 식탁교제의 정당성이 진정으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던 대상은 공동체 내부에서 이 관행을 납득하지 못하는 이들이었으며, 누가 기자는 율법적인 견지에서 공동체 밖의 바리새인들을 능가하는 세리를 부각시킴으로써 이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있다. 누가공동체의 구성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세리 그룹들과 함께 해 왔지만 온전히 화합하지 못하던 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에게, 누가 기자는 이 교제에 대한 가치 체계 상의 정당성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누가공동체에 있어 율법의 문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인종적 인 것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율법적 그룹과 세리, 창기 등 비율법적 그룹 사이에도 첨예한 문제였다. 누가 기자는 이처럼 다양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분열하는 상황을 화합하는 양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공통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핵심어: 누가공동체, 삭개오, 세리, 율법, 율법적 그룹, 비율법적 그룹, 분열, 공존, 식탁교제, 소유 헌납.
I. 서 론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
성서 본문에 대하여 획일화된 해석은 전통 이라는 이름 하에 더욱 공고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인 성서 이해가 신앙의 골격을 이루고 교회의 근간을 유지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는 점이겠으나, 다른 본문들이 이미 드러내고 있는 사항을 그 특정 본문 역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가 가지고 있는 다의성과 본문의 독특성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전이해에 근거하여 성서가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서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에 따라 우리의 믿음과 실천이 규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기존의 이해에 대한 비판적인 점검은 언제까지나 필요한 작업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주로 잃어버린 자의 구원 내지는 죄인의 회개 로 이해되어 온 삭개오 단락(눅 19:1-10)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삭개오 단락을 죄인의 회개 로 이해하는 학자들의 해석은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개역)는 구절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15장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잃은 자 의 모티브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이같은 전망은 19:8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개역)라는 진술을, 회개 후 결단의 표시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첫째, 삭개오가 자신의 회개의 표시로 구제를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되는 19:8의 진술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형(di,dwmi, avpodi,dwmi)으로 쓰여 있다. 결국 이 말은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밑에서 다루겠지만 전통적인 이해는 19:10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둘째, 삭개오는 예수가 자신의 초청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재산을 나눠주고 토색한 것을 갚겠다 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와 자신이 함께하는 것을 수긍하지 못하는 뭇사람들의 힐난(19:7)을 듣고 이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도된다(19:8). 선입관이 배제된 채 이 기사를 읽는 독자는, 만일 이 반대자들의 질책이 없었더라면 삭개오는 단지 예수와 식사를 같이하는데 그치고 말았을지 모른다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 삭개오 단락을 죄인의 회개 및 구원 에 대한 것으로 보는 해석은 바로 앞 부자 관원 단락(18:18-30)과, 재산 헌납의 기준이 공정하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소위 율법을 다 지켰다는 부자청년은 재산의 전부를 다 바쳐야 하고(18:22), 소위 죄를 지었다는 삭개오는 재산을 절반만 바치면 충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19:8). 부유한 율법적 그룹의 유대인 독자가 이 기사를 본다면 삭개오의 위법 행위를 먼저 생각할 것이므로 이를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잃은 자를 찾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면 차라리 부자 라는 언급없이 소개하는 편이 누가복음서의 전체 기조에 더 잘 부합되었을 것이다(1:53; 6:20; 12:15; 16:13).
넷째, 19:10에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개역)는 원문이 h=lqen ga.r o` ui`o.j tou/ avnqrw,pou zhth/sai kai. sw/sai to. avpolwlo,j 로 되어 있다. 곧 원문은 잃어버린 자 가 아니라 중성 단수 명사, 잃어버린 것 (to. avpolwlo,j)이다. 유사하게 잃어버린 사람 을 언급하는 15:24, 15:32의 두군데 모두 이것을 남성(avpolwlw.j)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누가의 기록은 특기할 만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19:10은 전면적으로 그 번역을 검토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이 19:10을 당연히 잃어버린 자 를 구원하다 로 해석하는 것은 15장 등에 의한 선입견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다섯째, 삭개오는 회개의 징표로 이해되는 바,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다. 본문에는 삭개오가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자 했다고 진술되어 있을 뿐 회심에 대한 어떠한 진술도 나타나지 않는다. 환언하면 본 단락에는 죄인이 회개한다고 할 만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23:39 이하에서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있고(23:40f.),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23:42), 예수에 의해 구원의 선포를 약속받고 있다(23:43). 또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발을 닦았던 여자 죄인은, 죄가 있음이 예수에 의해 인정되고(7:47) 죄사함이 선포되는(7:48, 50) 등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언급이 있으나 삭개오의 경우는 이런 요소가 전혀 없다.
결국 삭개오 단락을 잃어버린 자 , 곧 죄인 의 구원으로 이해하는 해석은 많은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전통적으로 죄인의 회개 로 이해되어 온 삭개오 단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여기에 담긴 누가 기자의 의도를 밝히고, 누가복음서에 나타난 율법 및 누가공동체의 내부 정황을 규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연구 방법 및 연구 범위
성서신학 분야에서 지금까지 개진된 여러 연구 방법론들은 나름대로의 장점과 기여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전망 및 시각을 택했느냐 에 따라 그 해석의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각 연구자들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앞서, 자신이 원용하고 있는 연구 방법론이 해당 주제에 가장 적절함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환언하면, 단지 자신이 사용할 방법론을 미리 못박아 전제한 후, 다른 방법론을 택해 동일 본문을 해석한 학자들의 상이한 결론을 피상적인 수준에서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삭개오 단락에 대하여 본 논문이 취할 연구 방법론을 선택하는데 있어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누가 기자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중요한 보도에 앞서, 삭개오 단락을 배치한 것은 독자들의 어떠한 문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는가? 이러한 시각은 누가 기자가 무시간적 정황 가운데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독자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저술 활동을 펼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부언하면 누가 기자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암시된 독자(implied reader)로 삼고 있는 대상들의 정체와 정황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둘째, 삭개오 단락의 문제 상황은 삭개오의 죄와 회개 라는 가치판단 자체보다는 19:7에서 드러나듯 그에 대한 예수의 격리를 사람들이 요구하는데에서 먼저 비롯되지 않는가? 여기에서 기존의 연구가 삭개오 개인의 죄인됨 에 관심을 기울인 것과는 달리, 누가 기자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는 예수 시대가 아니라 저작 시점의 특정 독자들이 서로 갈등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전망은 삭개오 단락에 대한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도록 한다. 바로 이 독자들을 사회적 상호 작용 하에 놓여 있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며, 이 가운데 누가 기자는 예수 라는 권위를 통해 독자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II장 (1)절에서 언급하겠지만 고대 사회에서 세리 그룹을 배제하기 위한 가치체계는 율법 이었다. 본 단락이 이 율법에 의해 설치된 장벽에 대처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신학적 인 관심 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인 지평에 이르기까지 살필 수 있게 해준다. 곧 신학적인 관점에서 율법 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다면, 사회학적 인 관점에서는 인간 사이의 문제 에 더 무게가 실리게 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삭개오 단락의 의도 및 그 대상이 되는 배후의 독자들을 규명하는데 있어 사회학적 성서해석 을 그 방법론으로 채택하고자 한다.
사회학적 성서해석은 역사비평적인 범주에 해당되는 양식비평이나 편집비평과는 그 관심을 달리한다. 양식비평이 본문의 원전승이 생긴 삶의 정황을 추적하며 복음서의 저자를 수집가 로 보고, 편집비평이 그를 특별한 신학적 관심을 가진 편집가 로 이해하며 본문의 진술 상황을 추적하며 각 단락들의 역사적, 신학적 내용을 질문한다면, 사회학적 비평에서 복음서 기자는 공동체의 대변인으로서 특정 사회적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무리들과 긴밀한 상호 영향 아래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즉 신약성서의 진술 이면에 놓여있는 인간들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추적하며, 그것을 텍스트의 주요한 산출 배경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서중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학적 신약해석이란 신약성서 본문에 나타나는 사상들이나 행위들을 그 본문 배후를 이루고 있는 팔레스틴이나 로마 제국 사회라는 폭넓은 사회적 준거틀 속에 위치시키거나,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작은 단위의 사회적 준거틀 속에 위치시킨 채 해석하려는 하나의 전망 혹은 상상력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사회학적 신약 해석의 관심은 성서 본문의 신학적, 윤리적 진술들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진술들과 그것들의 사회적 상황들과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단지 문서가 생성되기까지의 정황을 밝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상호 관계는 한 주체만을 가지고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키(H. C. Kee)의 말대로 본문 이면에 놓여 있는 논쟁의 다른 주체를 찾아내고 그 상황을 밝히는 주석작업 이 필요하고 하겠다. 곧 이러한 전망을 본 연구 주제에 적용해 보면, 누가 기자가 긍정적으로 채색하고 있는 삭개오 란 인물이 준거틀로 기능하는 집단은 누구이고, 이들이 대립하고 있는 대상 및 상황은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누가공동체의 사회적 세계 안에서 이 단락의 의미는 보다 분명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망 하에서는 사회 집단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문제가 복음서 기자에 의해 답변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므로, 기존의 역사비평적인 전망보다 폭넓은 동기와 상황을 상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만일 삭개오 단락을 양식 비평의 전망에서 본다면 그 양식은 순수 인물 전설 이며 이 사화에는 역사적 회상 이 들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시각 하에서는 본 단락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가령 본래 9, 10절은 8절이 아닌 7절에 연결된다는 해석 등 를 규명하는 공헌점이 있지만 누가가 삭개오 사화 를 단순히 수집한 인물로 받아들인다는 한계가 있다. 이 전승의 원래 생성 정황에 대한 분석은 가능할 지라도 복음서 기자가 왜 많은 전승 중에서 하필 이 사화를 택해서 이렇게 수집, 위치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편집 비평은 삭개오 단락을 예외없이 죄인의 회개 로 본다. 이 전망 하에서 그 저작 의도를 분석할 경우 복음서 기자로서 누가에 비중을 두어 연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누가 이해는 그가 전승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초점을 두어 분석함으로써 누가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측면에서 기여한 바가 적지 않으나, 이것은 누가가 오로지 신학적 관심에만 근거하여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분석이다. 그러나 신학 이라는 개념만으로 누가가 당면했던 다양한 현실과 이에 따른 저작 의도를 다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삭개오 기사를 전적으로 잃은 자의 구원 으로 이해하는 것은 방법론상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의 본론은 3장(II, III, IV)으로 구성되어 삭개오 단락을 중심으로 누가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율법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II장은 19:1-6을 주석함으로써, 누가공동체 안의 다양한 사회적 구성원과 복음서 저술 당시의 내부 갈등 상황을 규명하고자 한다. III장은 19:7-8의 사항을 반영하며, 삭개오를 새로운 인물상으로 부각시키는 누가의 의도를 파악할 것이다. IV장은 19:9-10에 대한 해석으로서 누가가 공동체의 내분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려 했는지를 종합적으로 제시하려 한다.
연구사 및 연구 동향
① 삭개오 단락에 대한 연구
i ) 삭개오의 구원 이라고 보는 해석
삭개오 단락을 이와 같이 해석하는 학자들은 여기에 모두 나열할 수 없을만큼 많다. 이 대부분의 연구들은 삭개오 단락을 죄인의 회개 로 이해하였다. 이 해석은 극도로 부정적인 직업으로 간주되어 온 세리직 과, 본 단락에서 매우 긍정적인 채색되는 삭개오라는 인물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세리 등 소외받던 계층에 대한 누가의 특별한 관심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의 난점은 그 해석자들 자신에 의해서도 감지되었다. 가령 크레머(J. Kremer)는 삭개오와 예수의 만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짧은 이야기는 죄인들에게 향하는 예수의 상을 적절하게 전달해 준다. 이 죄인들은 경건한 자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들이다. 예수가 이미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등 이 장면은 부분적으로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예수 말씀이나 상황에 그다지 적절치 않은 삭개오의 해명의 요점은 이 단락이 본래 경구(Apophthegma)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레머의 해석은 전통적인 범주를 뛰어넘지는 못하고 있으나 전통적인 이해가 본문의 구성과 정황을 적절히 규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를 만나 그가 구원 을 받게 된 것이라면 왜 집으로 모시며 소위 회개 의 결심을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 직면하고서야 이 말을 하는지 어색한 여운을 남긴다. 크레머는 이것을 원전승의 편집 과정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이 전망 하에서 왜 누가는 전승구들을 매우 어색하게 연결시켜 놓았는지 해답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도에 대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동일하게 본 기사를 죄인의 회개 로 보더라도, 누가 기자의 의도가 어떤 대상 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학자로는 탄네힐(R. C. Tannehill)이 있다.
군중이 예수가 삭개오와 교제하는 것에 반대했을 때, 그들은 삭개오가 그렇게 고립될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 반대는 이야기 중에 긴장을 고조시킨다. 독자와 청중에게 삭개오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권위의 근원으로부터 강력한 답변이 필요했다.
탄네힐은 누가 기자가 특정 부류의 대상에게 삭개오 교제의 정당성을 제시하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나, 그 지시 대상은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이 옛날 예수가 죄인과 교제한 것을 달갑게 여기거나 그렇지 않은 문제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삭개오가 누구의 입장을 대변하는지, 그리고 누가가 이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대상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죄인의 회개 로 이해하는 해석이 갖는 한계점은 그 자체의 부적절성을 차치하더라도, 삭개오의 구원을 공표하는 것을 통해 누가 기자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려 했는지 거의 조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망 하에서 누가의 관심은 신학적인 것으로 제한될 뿐 그 이상의 해석의 여지는 없는 셈이라고 하겠다.
ii ) 삭개오에 대한 변호 로 보는 해석
본 단락이 전통적인 견해와는 달리 삭개오에 대한 변호 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소수 학자들이 70년대 말, 80년대 초 등장했다. 이 주장을 가장 처음으로 제기한 학자는 화이트(R. C. White)이다. 그는 자기 주장의 근거를 주로 19:8의 현재형 동사에서 취한다.
내가 준다 라는 말은, 내가 줄 것이다 나 이제부터 내가 준다 및 이제 내가 주고자 한다 는 말로 번역되어 왔다. 이것은 현재형으로 미래형을 대신하여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번역에 대한 단서를 우리가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는가?
화이트와 몇몇 학자들은 삭개오의 진술을 현재 행위로 보고 있다는데서 본 단락을 삭개오에 대한 변호 로 보는 주장을 강화하려 한다. 이들 주장의 문제점은 아래에서 상술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화이트의 진술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비난에 대한 변호와 삭개오의 명예 회복을 보게 된다. 구원은 왔다 그는 아브라함의 진정한 아들이다 라는 언급은 그가 착취자요 이스라엘의 특권에서 탈락한 사람이라는 비난에 대한 답변이 된다.
화이트는 19:9의 번역에서 오늘 이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말이 자신의 주장에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삭개오의 진술을 들은 예수가 그날에야 (sh,meron) 삭개오의 구원 이 이뤄졌다고 선언하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 왜냐하면 19:7에서 모든 사람 의 불평은 삭개오가 죄인 인데도 왜 교제하느냐에 모아지고 있는데, 삭개오의 말을 들은 후, 그것도 오늘에야 구원받았다 고 선포하는 것은 불평하는 사람들에 대한 효과적인 반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삭개오가 선행을 하고 있었어도 그 날 이전에는 죄인 이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논리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19:9, 10의 진술을 구원 으로 해석하는데서 오는 문제이다.
화이트와 유사한 견해를 보인 학자는 피츠마이어(J. A. Fitzmyer)이다. 그는 di,dwmi라는 동사가 현재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고, 미래적인 말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피츠마이어 자신도 19:8의 avpodi,dwmi를 현재형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색하다며 주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기사가 결정적으로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하는데는 미흡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또한 i )군 학자들의 견해 역시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어 변호 를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이후 삭개오의 변호 를 주장한 학자는 미첼(A. C. Mitchell)이다. 미첼 역시 자기 주장의 핵심 논거를 19:8의 동사로 삼고 있는데, 그는 9절의 구원 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누가에 있어 구원 (swthri,a)은 1:17에서처럼 죄의 용서만을 의미하는 것 이상이다. 이 구절은 1:69의 다윗적 메시야를 언급하며 1:71의 적으로부터 구함 받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쪽도 죄나 회개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미첼의 주장은 불평하는 모든 사람 을 대적자로 보고, 삭개오가 그들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참신한 해석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는 5:27-32 및 15:1-32와 이 단락을 비교해 볼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등장하지 않고 레위의 기사처럼 분명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본 단락에는 식탁교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무리한 추론을 시도한다. 이것은 삭개오가 죄인으로서 식탁교제에서 함께 한다는 모티브를 탈색시키고 삭개오를 변호하는 것 이라는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5, 15장을 위시한 여러 곳에서 이미 바리새인의 반대 모티브를 언급한 후 모든 사람 (pa,ntej)을 일컬을 때는 당연히 율법적 그룹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공동체원 전부를 가리킬 수 있을만큼 광범위한 지시어를 놓고 이들을 삭개오의 대적자로 처리해 버리는 것은 누가공동체가 세리로만 구성되었다는 가정 하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삭개오 단락에 밥먹는 장면이 없다고 해서 식탁교제가 아닌 것으로 보는 그의 추정은 식탁교제 가 누가복음서에서 왜 중요한지 자체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본 기사를 삭개오에 대한 변호 로 해석한 마지막 학자는 라벤스(D. A. S. Ravens)이다. 그는 삭개오를 간접세를 걷는 세리(toll collector)로 보면서 그들이 회개할 경우 자기의 재산으로 지인(知人)들에게 보상하고 나머지는 공공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했으므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는 것은 이 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가능하지 않다. 세리가 회개했다면 토색한 것을 갚기 전에 세리직부터 포기해야 했으나 예수를 만날 당시에도 그는 세리였기 때문에(19:2), 회개한 후에 이 보상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그의 주장은 견지될 수 없다.
결국 이 기사를 삭개오에 대한 변호 로 보는 해석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화이트에 대한 비판에서 언급했던 바, 삭개오의 선행과 관련지어 왜 오늘 구원이 일어난 것으로 처리했는지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상기 학자들의 주장대로 삭개오를 결국 잃었던 자 로 이해해야 한다면(19:10), 그들은 누가복음서 안의 잃은 자 가 과연 파격적인 선행을 하고 있었어도 율법적인 견지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사람이었는지를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15장에서 등장하는 소위 잃은 자 는 율법적 견지에서 명백한 죄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리새인들이 죄인 으로 정죄하는 세리 (15:1)는 율법적 그룹이 비난하는 항목들(15:13,30)에 대해서 반박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를 겸손히 수용하는 사람이다(15:17-20; 18:13). 오히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낯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8:14)의 언급을 토대로 추론해 볼 때, 누가 기자가 말하는 잃은 자 는 스스로를 변호하는 삭개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삭개오의 행적이 현재 하는 행위라면 그를 잃은 자 로 보기는 어렵다.
셋째, 이 학자들의 견해들에서 삭개오가 정죄받는 것이 세리직 때문이라면, 단순히 토색한 것을 갚아주거나 재산을 나눠주는 행위를 통해 과연 적대자에 대한 변호가 이뤄지겠는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삭개오가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이 맞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세리이다. 삭개오가 변호하려는 것은 무엇인지 여전히 불분명한 상황에서 죄인 이라는 그들의 비난이 불식될 수는 없다. 그들의 연구는 변호의 과정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삭개오 기사를 변호 로 보는 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전혀 답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학자들의 논지는 오히려 이들을 비판하고 있는 i )군 학자들보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앞에서 언급한 2 갈래의 연구 동향은 모두 세리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누가공동체 안에서 이 기사가 갖는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세리 등 소위 죄인 과 교제하는 관행을 표상하는 바,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 라는 관점으로 볼 때 삭개오 단락은 전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바리새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식탁교제가 첨예한 문제가 되도록 기능한 정결법 을 살펴보고, 식탁교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②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에 대한 연구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는 주로 공동체 밖의 유대교, 그 중에서 특히 바리새 공동체 그룹과의 관계 가운데 부각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 점은 엘리엇(J. H. Elliott)에 의해서 지적되었다.
누가 행전에 따르면, 성전과 관계되어 있고 모세의 율법 및 바리새인의 구전 전승에 의해 합법화된 정결 체계는, 예수와 그 추종자들의 체계와 피할 수 없는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은 목스네스(H. Moxnes)에도 발견되는 부분이다.
누가는, 유대 사회가 식사에 관한 경계선(boundaries)에 있어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기술한다. 가장 잘 알려진 예는 15:2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들을 받아주시고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불평하는 것이다. 5:30에서도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유대 사회의 거룩함을 위협하고 부정한 외부인을 식탁교제에 끌어들임으로써 금기 사항을 깨고 있다.
물론 목스네스를 위시한 학자들 중 누가-행전의 저작 시점을 고려하여 이 문제를 다룬 학자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30년대 예수와 바리새인의 장면을 통해 누가 기자가 궁극적으로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없다면 이것은 결국 예수가 왜 바리새인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석하는 수준에 머무는 추정이라고 하겠다. 이에 반해 에슬러(P. F. Esler)는 식탁교제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첨예한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누가 행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식탁교제가 초대 교회의 열띤 논쟁의 주제였고 누가 당시에도 그러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몇몇 단락들이 있다.
그의 연구 범위가 누가-행전 이라는 것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에슬러는 식탁교제의 범위를 사도행전의 문제로 제한시켰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그는 사도행전 15장의 장면 등을 주요한 주제로 취급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서의 식탁교제 유대인들끼리도 함께 자리하는 것이 문제되었던 를 누락시킨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식탁교제의 문제를 바리새 공동체와의 관련 하에 다루지 않고 누가공동체 자체만의 문제로 처리하는 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동체의 결집(integration)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머문다. 이러한 차원에서는 공동체 라는 개념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모인 조직 의 개념 이상으로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미시적인 관점에서 세부 집단간의 관계를 조망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 및 그 대상이 되는 공동체는 단순 조직 이 아닌 인간 의 모임이기 때문에, 식탁교제라는 민감한 관행을 구성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에 대한 연구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누가공동체 내부 역시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공동체 외부와의 첨예한 문제가 내부적으로는 완전히 정리된 문제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희박한 개연성을 가지는 추정일 것이기 때문이다.전술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이 식탁교제를 바리새 공동체 및 공동체 밖의 유대인 및 이방인과의 관계 가운데 파악했다는 점에서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환언하면, 누가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들이 이 식탁교제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 연구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I. 율법의 장벽과 죄인 삭개오
율법에 의해 차별받는 죄인 세리
복음서에 등장하는 세리 단락에는 이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자들이 죄인 으로 묘사되며, 예수가 이들과 가까이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 제시된다. 세리는 왜 죄인이며, 이 세리에 대한 논의가 율법 의 문제와는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세리의 죄인됨에 대한 논쟁은 페린(N. Perrin)과 예레미아스(J. Jeremias)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페린은 세리들이 죄인으로 취급된 것은 의례적(儀禮的, ritual)인 것 외에도 그들이 이교도들과 접촉하며 이방 압제자들에게 고용된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서 예레미아스는 세리들이 자신들을 부정직으로 이끌게 만드는 직종에 종사했기 때문이라고 논박한다. 양자의 논리는 모두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세리들을 바리새인의 눈으로 보느냐와 일반 백성들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이유는 달라진다고 주장하는 예레미아스의 견해는, 세리에 대한 연구 자체가 복음서에 비친 세리像을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측면에서 부적절하다. 세리는 복음서에서 정결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죄인 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탈무드에서 보듯 그들의 부정직으로 인한 백성들의 부정적 시각이 없었다면 일반화시킬 수 없었을 개념이기 때문이다. 특히 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세리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예레미아스가 본 것처럼 바리새인이나 일반 백성의 시각 중 하나를 택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뒤섞여 있다. 공관복음서는 단지 바리새인들과의 율법적 논쟁을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 유대적 가치관 아래 주변 세계와 충돌하고 있던 공동체를 위한 글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삶의 저변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던 일반 백성들의 가치관을 배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리는 율법적인 차원과 일반 대중의 부정적인 정서가 맞물려, 종교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 이르기까지 죄인 이라는 이름 하에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 세리들이 담당하고 있었던 일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도나휴(J. R. Donahue)는 주전 44년을 기점으로 직접세(tax)를 걷는 세리(publican)의 일은 로마 총독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주전 47년 시이저는 유대인의 과세 제도에 중대한 수정을 가했다. 폼페이의 징수 체제를 따르기는 했지만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세금을 줄였고, 안식년에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중략) 주전 44년의 칙령에서는 더 나아가 직접세 세리제도(publican system)가 폐지되어 세금의 수령은 행정장관이었던 힐카누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략) 주전 44년 이후에 고전적인 징수제는 팔레스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도나휴의 연구가 괄목할 만한 이유는, 세리에 대한 그 전의 연구들이 집중적으로 조명하지 못했던 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세리 는 주전 44년 이후 없어졌던 tax collector(즉 publican)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로마로부터 세금을 걷을 권리를 샀던 toll collector였고, 이들은 간접세만 징수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모든 telw/nai는 toll collector로 번역해야 옳으며 이들은 개인적으로 할당분을 채우기 위해서, 또 자율적인 징세를 통해 자신의 부를 축적해 나갔다는 것이다.
도나휴의 연구는 세리에 관한 역사적 상황을 설득력 있게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헌하고 있으나, 문제는 세리라는 직업군의 다양성을 단지 개괄적인 역사 흐름 속에 묻어버렸다는데 있다. 과연 당시의 세리들이 모두 일관되게 간접세를 걷는데만 종사했는지, 또 이들의 부정직한 행위가 구체적으로 복음서에 어떤 양상으로 반영되어 있는지를 밝히는데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여기에서 한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당시 세리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던 관행의 원인과, 세리들을 죄인 으로 규정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외형적인 명목상의 근거는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전자는 세리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들의 혈세를 징수한 것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후자는 그 반감을 실질적인 구속력을 갖게 하기 위해 가치 체계를 사용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율법 이라고 할 수 있다. 환언하면, 종교적인 영역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율법이 가지는 기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측면은 단지 세리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누가의 율법관이라는 주제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누가복음서의 율법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연구들이 있었지만 그 초점은 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에 맞춰져 왔다. 이러한 현상은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이라는 연작(連作) 형식 때문에, 이후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현안이 되는 이방인 선교와 율법의 문제를 중요하게 보는 저간의 관행에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의 누가공동체라 할지라도 두 문서가 동일한 상황과 목적을 가지고 저술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따르기 때문에 양자는 섬세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누가복음서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취급해야 하는 식탁교제 는 예수가 죄인 들과 함께 자리한다는 문제 정도로 제한될 것이 아니라,예수가 율법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차원에까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므로 소위 죄인 들로 간주된 세리, 창기, 강도, 부정한 질병에 걸린 환자 등에 대한 문제는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항이라고 본다.
그 중에서 가장 간과하기 쉬운 대상은 세리 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들이 경원당하고 있었던 이유에는 상당히 복합적인 요소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결법 이라는 율법 때문에 죄인 으로 간주되는 것과 누가의 율법관을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1세기 말 이미 유대교의 핵심분파로 남았던 바리새파와 세리는 공존 불가능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2세기의 랍비 문헌은 바리새인들과 세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골이 패여 있음을 드러낸다. 바리새인 조합(guild)에 가입하려는 telw,nhj는 자기 직업을 포기하고 속였던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이러한 측면은 세리에 대한 멸시가 단지 예수 시대에만 발견되던 관행이 아니라, 1세기 후반 이후에도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가복음서의 저작 시기로 추정되는 80년대까지도 이것은 가장 현저한 사회적 장벽의 한 실례(實例)로 제시할 근거가 마련된다. 아래 (2)절에서 상론하겠지만 공관복음서에만 등장하는 telw,nhj 란 단어는 누가복음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고, 가장 긍정적으로 채색된다는 점은 누가공동체에게도 세리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방증(傍證)한다. 율법에 대하여 상당히 보수적으로 보이는 언급은 누가가 이 공동체 내의 율법주의 성향을 가진 멤버들을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이 세리 그룹과 장벽을 쌓았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삭개오와 누가공동체의 구성원
앞서 말한 대로 세리들은 사회적인 장벽에 갇힌 상태에 있었고 주변의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서에 반영된 예수와 세리의 관계는 어떻게 규명될 수 있는가? 이미 예수가 존재하지 않던 80년대 누가공동체의 현실에서 각 구성원은 예수를 핵심 준거틀로 삼는다.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누가의 예수는 누가공동체 자체(= 준거틀)이다. 가령 11:42이하에서 바리새인과 첨예한 대립을 나타내는 예수의 과거 모습은 현재 바리새 공동체화 대립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누가공동체는 현재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투를 과거 예수의 모습을 회상하며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외부와의 관계 가운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 내부 안의 긴장관계와 대립의 해소를 위해서도 긴요한 것인데, 이 경우에 있어서도 가장 궁극적으로 제시되는 모델은 바로 예수라 할 수 있다. 만일 누가공동체 안에 사회적 신분에 있어서 차별받는 인물군이 과거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면 이것은 현재 그들이 받고 있는 차별이 정당하지 않음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이 현실을 통제하는 규범으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갈등 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 삭개오가 예수에게 나아갈 수 없는 이유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본문에 드러나는 이유는 2가지로서, 먼저 삭개오 자신의 키가 작은 것(19:3c)과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것(19:3b)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유가 누가공동체에게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지 추론하기에 앞서 한가지 전제해야 할 것은 본문이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은 바를 해석가의 주관에 근거하여 추정하는 것은 지나친 알레고리화를 범할 소지가 높다는 점이다. 예컨대 삭개오의 키가 작은 것 의 의미를 명백한 근거없이 해석 하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에 치우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예수에게 나아갈 수 없었던 직접적인 요인은 무리들로 인한 (avpo. tou/ o;clou)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키가 작다 하더라도 사람들로 인해 예수가 가려져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는 예수를 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는 삭개오 단락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소경 기사(18:35-43)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소경은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도움을 청하나(18:38) 앞서가는 자들 은 그를 꾸짖어 멀리하고자 한다(18:39). 마가가 꾸짖은 주체를 관사도 없이 단지 많은 사람 (polloi.)으로 처리한데 반해(막 10:48), 누가는 이것을 앞서가는 자들 (oi` proa,gontej), 즉 앞에서 이끄는 자 로 변경한다. 이는 누가가 공동체 내부의 주도적인 입지를 가진 그룹들을 가리키며 그들이 소외 그룹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비판하는 대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삭개오가 예수에게 나아갈 수 없는 것은 무리들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던 단절 에서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식탁교제에 대한 저간의 논의는 주로 바리새 공동체와 누가공동체 사이의 대립 및 갈등 구도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연구들이 죄인 들과 함께하는 누가공동체의 양상을 규명했다는 측면에서는 공헌했지만, 그러한 식탁교제를 공동체 내부의 유대적 배경을 가진 멤버들이 어떻게 이해했을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를 비난하는 사람이 공동체 외부에만 존재한다는 가정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15:2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부 사람들의 불만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외부 인물을 빗대어 죄인 을 용납하지 않는 내부의 율법적 인물을 지시하고 있다. 즉 큰 아들의 태도를 비판함으로써 공동체 내부에서 식탁교제를 꺼리는 그룹의 태도를 교정하려는 의도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삭개오 단락의 반대자들도 동일하게 공동체 내부의 인믈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를 추종하며 예루살렘 입성에 동행하던 이 사람들은 삭개오가 접근할 수 없을만큼 밀접하게 예수를 수행하고 있다(18:39; 19:3). 둘째, 모든 사람 (pa,ntej, 19:7)이란 말은 누가공동체의 식탁교제를 당연히 비방할 외부인(5:30; 7:34f 등) 외에 다른 그룹들이 더 해당됨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들은 내부 멤버 까지 포괄하는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셋째, 이 모든 사람 은 바로 이어 19:11에서 비유를 듣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는데, 비유는 제자들에게 하는 교훈으로 이해되므로(8:9f; 12:41) 이 기사는 공동체 내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설득력을 더 얻을 수 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누가복음서의 어떠한 식탁교제 장면에서도 삭개오 단락을 제외하면 초대 나 함께 자리함 , 먹고 마시는 것 이상으로, 예수가 머물거나 쉬기로 하는 식탁교제의 형식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스트(A. A. Just)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가 머무르다 (meinai)와 초대받다 (katalusai)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를 한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누구의 집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필연적으로 식사를 했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삭개오와 식탁교제를 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다, 이 만남이 누가복음서에 발견되는 일반적인 식탁교제보다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간과하고 있다. 소위 죄인과 식사하는 것을 꺼리는 유대인들이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로우이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것이 신적인 계획 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일반적인 진술은 예수가 집에 머문다 는 것의 의미가 누가공동체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서는 면밀히 고찰하지 못했다. 이것은 공동체 내부에서 비율법적 그룹과 형식적으로는 함께 하고 있으나 진정한 교제를 이루지 못하는 율법적 그룹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한 누가 기자의 고안으로 볼 수 있다.공동체 외부에서 보면 율법적 그룹 역시 식탁교제에 참여(u`pede,xato, eivsh/lqen)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부적으로는 화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이다. 7절의 진술은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Para. a`martwlw/| avndri. ) 들어가 있지만( eivsh/lqen ) 아직 둘 사이의 교제( mei/nai, katalu/sai )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임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7절 하반절에서 볼 수 있듯 공동체 내부의 율법적 그룹을 표상하는 모든 사람들 의 질책에서 비롯되고 있다. 만일 이들이 공동체 외부의 인물이었다면 5:30이하와 같이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면 충분할 것이나 내부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불만은 가치체계상의 설명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누가공동체에게 있어 그 구성원에 세리 나 창기 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하고 있는 정도를 토대로 가늠해 본다면, 단지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수준(eivsh/lqen)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 이들이 진정으로 화합(mei/nai, katalu/sai)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재 공동체 내에서 비율법적 그룹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가치상의 정당성 이다. 삭개오의 현재적 진술(19:8)은 율법적 그룹이 비율법적 그룹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합법화 과정의 일환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가 단지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정도 이상의 긴밀한 교제(머묾)를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수준이 swthri,a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구조 및 누가공동체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swthri,a 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예수의 머묾 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19:5과 19:6의 정확한 병행 관계를 나타내는 다음의 도식은 그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말하는 swthri,a가 삭개오의 집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식탁교제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누가의 예수는 삭개오의 선행을 보고 그의 집에 머물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삭개오를 볼 때부터 이미 교제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위의 본문상의 구조로 볼 때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서 머무는 것 자체가 이미 swthri,a이고 삭개오의 긍정적인 진술은 단지 이 예수가 머무는 것 을 가능하게 한 근거로 볼 가능성이 마련된다.
재언하면, 누가공동체의 중요한 부류를 형성했던 세리 그룹들은 사회적 통념과 종교적 기제가 맞물려 소위 율법적 그룹 에 의하여 멸시받고 있었던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율법적 그룹은 누가공동체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식탁교제를 일종의 관행 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심정적으로는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에 누가의 예수는 표면적인 식탁교제보다 깊은 의미의 교류를 할 수 있도록 그 정당성(dei/, 19:5)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당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III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III. 율법의 정죄와 의인 삭개오
율법을 통해 정죄받는 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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