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윤리'와 '비신앙', 어느 것이 죄인가?
1. 윤리와 신앙과 다른 점
윤리란 환경에 민감하다. 그것은 윤리를 가지고 얻고자 뭔가 얻고자 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환경은 인간에게 날마다 새로운 기대치를 주게 되고 동시에 그 기대치가 가능성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 방법도 또한 새로이 창안하게 된다.
그래서 윤리란 인간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욕망이 자극되면 거기에 따라 방법론도 틀려지니까 윤리도 같이 변동된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 과연 윤리와 무관한 행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목적 없는 윤리라는 것이 과연 성립할까?
인간의 자체적인 힘으로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터에 괜시리 하나님께 모든 것을 위임할 수 있을까?
아마 '협조 요청'(기도) 정도에 조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 또한 어디까지나 자신이 발의한 것이기에 최종 책임도 자신이 지려고 한다.
욕망 없는 목적은 생기기 않는 법이요, 모든 목적은 가능성을 토대로 한다.
따라서 가능성은 이미 욕망 안에 같이 들어있어 목적과 더불어 항상 붙어 다니는 것이고 그 가능성을 수월하기 위해 행동을 조절하려고 들기 때문에 이처럼 윤리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의 발현이 된다.
되고 싶어하는 것과 갖고 싶은 것을 앞당기고 싶어서 윤리적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면 무엇을 노리는 윤리인지도 함께 털어놔야 한다.
"윤리가 뭐가 나쁘냐 윤리가 죄냐?"라고 하면서 대들 것이 아니라 그 윤리로 달성하고자 하겠다는 목적 달성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의 영광을 놓고 예수님의 행위와 자진해서 경쟁 관계에 돌입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임을 알아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내실 수 있는 하나님 영광을 그도 과연 달성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검토 받게 된다.
여기에 비해서 신앙은 윤리와 다르다. 어떤 환경이든 그 환경은 자기 소유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적절하게 늘 제공하고 계시는 환경이다.
따라서 그 안에 주어진 모든 것을 인간이 달성해 낼 목적이 아니라 믿어서 참여해야 될 선물로 본다. 이는 성도가 자기 나름대로의 목적이라는 말이 된다.
단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맹세하시어 목적해 놓으시고 제시하신 바, 그것을 바라보고 의지할 뿐이다.
"믿음으로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5-6)
이 본문에서, '모세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모세는'라는 점에 주목해 봐야 한다.
즉 믿음의 세계에서는 '모세의 존재됨과 형성됨' 도 믿음의 사역이며 산물이다는 것이다.
믿음은인간들의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을 향한 창조자의 활약상을 대변해주는 표현이다.
성도의 신앙 속에는 '자신의 가능성'이란 전혀 들어있지 않고 오히려 철저하게 배제하게 된다.
'자신의 가능성'을 배제했다는 것은 '자신의 윤리성'도 또한 신앙의 내용으로 삼을 수 없다는 말이다.
자신을 믿는 신념은 신앙이나 혹은 대체물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인간의 보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대신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서 제공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따라서 기도나 간구나 금식의 동기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성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의의를 어떤 식으로 표출하는가를 철저하게 찾게 된다.
죄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이 개입되지 아니한 상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2) 이 본문에서 '가두었다'는 표현과 그 뒤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련성을 검토해야 한다.
꼼짝없이 가두어진 상황을 만들어 놓고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마치 수배범을 찾아 저격하는 전문 저격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인간도 심판의 표적물에서 제외 될 수 없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이러한 율법으로의 다가서심은 이 땅에 무엇을 생성하기 위함인가? 죄를 더욱 더 생성하기 위함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이 본문에 의하면, 은혜는 은혜를 주시는 분의 선택이 의해서만 혜택이 돌아가게 된다. 은혜를 받아내기 위한 특별한 윤리, 도덕적 묘책은 있을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이 세상에서 은혜를 증거하지 않는 자는 성도가 아니요 의인도 못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죄란 윤리의 유무로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유무에 의해서 결정 난다.
2. 죄
죄란 '하지 말라'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부터 인간들은 '하지 말라'는 선을 넘어서는데서 진정한 인간다움(죄인으로 이미 돌아섰다는 사실에 부합되는 그 인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
죄를 안 지으면 인생에 있어 자극이 없다. 하나의 윤리적 선을 넘어가면 더 큰 죄악의 선도 넘어서고 싶어진다.
만약 그 선을 안 넘게 되면 마음의 병이 생긴다. 뻔히 보고서도 그 미지의 세계를 안 밟고 돌아선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굴욕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갖은 핑계를 만들고서는 또 도전하게 된다.
"하면 된다!"는 구호도 사실은 "못 넘을 윤리적 선은 없다!"는 뜻이다. 넘고 또 넘으면서 인생의 지루함을 잊는다다.
"늙어서는 죄 못지으니 젊을 때부터 착실하게 죄 지어주어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도전하고 또 도전할 만한 자극적인 죄악거리를 연구하는 것이 인생에서의 주과업이다.
반성과 후회는 자기가 자신에게 침착과 속도 조절을 행사하는 능률적인 제슈쳐에 불과하다.
같은 상황이 되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질질 흘리면서 후회할 수밖에 없는 그 짓을 또 하게 된다.
혼자서하면 책임감이 더 무겁게 될 것을 우려되니 여러 친구를 사귀어 놓고서 필요에 따라 가담 정도를 조율한다.
함께 악을 도모하면 무거운 양심 가책을 혼자서 짊어질 필요가 없게 된다. 조직의 잘못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양심 가책을 고려해서 적극적으로 친구 만들기에 나선다.
('외롭다'는 말은 죄악의 경계선을 넘는데 도와 줄 사람이 별로 없어서 살아가는데 자극성이 많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이 인생의 본심에 대해서, 윤리와 도덕이란 이 본성에 전체적으로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양심이라는 이름의 큰 천막으로 전체를 뒤집어 씌워 힘으로 죄를 아예 눌려버리겠다는 작업이다.
즉 죄라고 여기는 모든 것에 도전하여 하나 하나 그 성깔을 정복해서 궁극적으로 나에게 죄가 돋아나지 않게끔 완전히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 역시 도전 정신의 연속이다. 어쨌던 내 힘으로 싸워 이기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해서 '나'라는 자의 의의를 명확히 하겠다는 것이다. '하고 싶다'가 '드디어 했다'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서 결국 못하게 만들고 싶었던 그 '하고 싶음'을 '드디어 해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 '해냈다'는 점에는 같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예 반성이나 후회나 회개할 필요도 없는 인간이 되도록 했다는 것에 대해 성공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나오는 것은, 평소에 죄를 구체적으로 구상해 내는 작업에 밑받침되어 쉴새없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탐내고 싶다'는 말은 탐심이 이미 내장되어 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따라서 과거의 죄를 극복한 실적이나 업적은 매순간 올라오는 지금의 '하고 싶다' 앞에서는 전혀 힘이 되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미래에 죄 지을 가능성이 누구나 농후하기에 그 미래가 되기 전이 어느 시점에서도 자신을 가리켜 '성공한 인생'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한 번 성공은 이미 지나가 없어져 버린 사항이다.
전에도 이겼으니 이번에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왜냐하면 죄를 이기려면 아예 마음 속에서도 조차 '∼하고 싶다'라는 생각조차 없어야 한다.
쉽게 말해서 '경찰 있음'은 '도둑 있음'에 종속된다. 도둑이 없는데 경찰이 왜 필요해야 하나?
같은 자아 내부에서 경찰의 승리를 얻고자 한다면 도둑을 모든 사례를 모르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경찰의 승리를 위해 도둑의 경험이 필요해서 요구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이미 도둑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경찰 승리'의 의미가 죽을 때까지 확정되어져 가는 것이다. "아 전에는 이것을 도둑질이라고 보지 않았는데 이제 이 시점에 와서 보니 이것도 도둑질의 일종인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 사실에 몰랐던 젊은 시절의 자부했던 양심 승리, 신앙 승리는 모두 다 무지와 허풍의 산물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3. 결 론
갈수록 회개거리가 없어지는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인가? 그 자는 나중에 자기 부인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어느 시점에서 십자가와 결별 자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저격병의 사살 대상자요 범죄하고 도망다니는 수배범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특정 인간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해 준 것 뿐이다. 로마서 11장은 이 사실을 이렇게 소개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34)
누가 불순종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신앙은 이처럼 불신앙적 앞에서 의가 되고, 불신앙은 이처럼 신앙 앞에서 비로소 죄로 드러난다.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결정한다. 그것은 새언약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