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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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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21장3절4절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인 새로운피조물 고백기도

 

나는 영생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사탄을 정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나는 믿음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되었습니다.나는 거룩한자입니다.

나는 모든것을 탁월하게 할수있는 은혜가 있습니다.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며 하나님의 생명과본성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영생은 나의것입니다.의는 나의것입니다.

죄를 죄거함은 나의것입니다.구원 구출 해방 자유는 나의것입니다.

치유와 신성한건강은 나의것입니다.형통은 나의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권세를 가지고있습니다.나는 아가페 사랑을 할수있습니다.

나는 지혜가 있습니다.나는 상황을 바꾸며 항상 승리하는자입니다.

나는 내인생의 선지자입니다.나는 영혼구원자이며 킹덤빌더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사 우리를 영광스런 아버지 나라로 데려가십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개혁)킹덤빌더교회목사 이상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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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후 선택설과 타락전 선택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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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킹덤빌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134.114) 작성일16-02-14 19:23 조회190회 댓글0건

본문

타락후 선택설과 타락전 선택설


성경을 구원론으로 접근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대전제가 먼저 연상된다. 즉 "일단 죄라는 것이 성립되어 있어야 그 다음에 구원이라든지 유기(버려둠)라는 개념도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타락하기도 전에 어떤 자를 구원하기로 선택했다는 말은 구원 계획 순서상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론으로 출발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타락후 선택설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어거스틴 이 후 선택교리를 주장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타락후 선택론자들이다. 위필드나 핫지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제시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렇다.

①창조하시고 ②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시고 ③타락된 인류가운데서 어떤 자들은 영생의 복락을 주시기로 택하시고, 또 어떤 자들은 마귀와 악한 천사들과 같이 그들이 받을 당연한 형벌 아래 그저 버려두시고 ④피택자의 구속을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⑤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획득된 구속을 피택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셨다

그러나 성경을 구원론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5:39의 말씀처럼 성경은 곧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라는 계시론적 관점에서 출발하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서 다 드러난 버린 예수님의 속성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도 긍휼의 그릇도 필요하고 진노의 그릇도 필요하다. 따라서 구원론적 관점과 전혀 다른 죄관이 이 차원에서 새로 밝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구원론에 의한 죄관과 계시론에 의한 죄관이 상호 다르다는 말이다.

구원론에 의한 죄관은 인간 스스로가 선악체계에 의해서 조성된 죄관으로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본인도 충분히 감갑을 수 있다는 것을 당연시 한다. 그러나 계시론에 의한 죄관에 의하면, 선악체제에 있는 죄관은 잘못된 죄관으로서 그런 죄관에 매여서 '이것이 죄이다!'라고 내세우는 내용이 이미 죄에 오염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계시론에 의한 죄관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6:8에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라고 되어 있다. 이 본문에서 인간들의 '죄에 대하여' 성령이 책망하신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도대체 인간들이 어떤 죄관을 갖고 있기에 그 죄관 자체마저 죄라고 규정받을 수 없는 것인가? 죄관이 잘못 되어 틀어지면 구원관, 천국관, 메시야관도 연이어 뒤틀리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죄관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로소 소개하셨던 바로 그 죄관을 뜻한다. 거기에 비해 바리새인을 대표로 한 인간의 죄관은 예수님이 소개하는 죄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게 된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꾸하신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요 15:22)

이 본문에 보면,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라는 문장이 나와 있다. 즉 그동안 아무나 못했던 일을 예수님이 그들에게 내보이신 것은 그들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이다. 달리 말해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자기 의를 만들어내기 위해 하나님께 대단한 열심을 드렸다.(롬 10:2-3) 바로 이러한 자기 열심과 행함을 기준으로 해서 그들은 나름대로의 '죄관'을 형성시킨 것이다. 바로 자기들 기준에 안 맞으면 죄라고 규정내리는 식으로 죄관을 성립시켜 놓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이들 유대인들이 도저히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심으로 오히려 그러한 죄관 자체가 문제가 있음을 고발하고자 했다. 또한 성령께서도 이 일을 연속으로 끌어가고 계시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중풍병자들 고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 능력에 놀란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 병고침을 '죄사함'의 능력으로 해석하고자 할 때 유대인들은 격분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기존의 자기들 죄관에서 필수적 요건이 되는 인간의 열심이나 행함의 자리가 완전히 부정당할 수 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냥 예수님의 사죄의 말 한마디에 용서가 되고 구원이 된다면 인간의 행함이 끼어들 자리조차 없게 된다. 예수님은 더나아가 말씀하시기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제격이다고 하신다. 즉 헌 부대를 가지고서는 새 술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란다. 오히려 죄인을 브르러 오셨다. 의사가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지 건강미를 뽐내고 있는 자에게 의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이 말씀은 곧 병자 고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의 주목적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어떠한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병자가 요청되는 것이다. 베데스다 못 가에서 고침받은 38된 병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바리새인들이 격분할 수 밖에 없는 식으로 예수님은 그 병자였던 사람을 다루신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적과 그 담긴 사상은 바울 서신에 요약되어 잘 나온다.

로마서 9장 11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인간)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서는 것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부르시고 누구를 어떤 식으로 살게 하시는 방식에 맞추어 성취된다는 말이다. 이 말 뜻 속에는, 인간이 태어나서 저질런 죄나 선행이 하나님의 근본 뜻에 영향을 주어 변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확정적으로 표현하기를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 적어놓고 있다.(롬 9:11)

만약에 하나님의 뜻이 이것과 달리 죄가 있어야 비로소 구원과 유기가 판정난다고 한다면위의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져야 한다. "그 자식들이 태어나지 전이나 갖 태어 날 때는 아직 구원과 유기는 확정되지 아니했다.(이 둘 중에 어느 한쪽으로 구원의 우선권은 미리 쏠리는 것은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은 인간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서게 된다. 이로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만으로 달성할 수 없고 인간의 행동 추이를 보고 차후에 결정되어진다."라는 식이다.

그러면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구원이라는 성립될까? 물론 안 된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건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도 또한 놓쳐서는 아니 된다. 즉 이미 죄악 속에 지배를 받는 인간들이기에 이 인간들의 행함을 의미를 두고 구상해 내는 죄관은 엉터리 죄관이라는 사실이다는 말이다. 바로 이점을 유대인들은 몰랐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았고 이 점을 예수님만 아셨기에 그들을 저주로 규정하셨다. "너희 아비는 마귀이다"(요 8:44) 이로서 벌어진 십자가 죽음을 두고서 성령께서는 이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고자 나서신다.

이 말은 곧 성령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자기 지혜로 자기 죄조차 알 도리가 없다는 말이 되고 만약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정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면 십자가 앞에서 결코 자기 행함이나 지혜를 자랑치 않을 것도 역시 분명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이 바로 자신의 엉터리 죄관으로 인해 생긴 사건임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둔 것은 모두 죄가 된다. 즉 선을 행했기에 선이라고 한다든지 악을 행했기에 악이라고 하는 생각 모두가 죄이다. 반대로 예수님의 행함의 의미를 두면 모두 의가 된다. 즉 예수님의 행함을 믿지 아니하면 죄가 되고 예수님의 행함에 전적으로 믿음은 의가 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라는 말씀 속에서 이미 죄의 왕노릇 아래 놓여 있는 인간으로서 이 사실 조차 받아들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 발생된 성령세례가 주어질 때만 방문 언급한 성경 구절을 믿음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성경 말씀조차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의로운 행위가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론으로 말씀에 접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짓은 유대인들이 했던 짓이고 결국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저주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의로운 행함으로 출발해서 다시금 타락 전 선택설이 옳은지 타락 후 선택설이 옳은지 검토하면, 우선 타락 전 선택설의 주장은 이렇다. ①창조될 자들 가운데서 어떤 자들을 영생하도록 선택하고 어떤 자들을 멸망하도록 정하시고 ②창조하시고 ③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시고 ④피택자를 위하여 구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⑤이 구속을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셨다 그런데 타락후 선택설이나 타락전 선택설이나 둘 다 ①과 ②를 순서지워 놓았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에베소서 1:4를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되어 있다.

이 본문에서 '택하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니, 택할 대상도 아직 생기지도 아니하는데 어떻게 '택하사'가 가능한가? 즉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자를 어떻게 택하는가? 뭐가 있어야 택하지! 그러니까 타락전 선택설이나 타락후 선택설에서 이야기하는 선택과 에베소서 1:4에서 언급하는 선택설은 범주의 틀 자체가 다른 것이다.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선택설은, 하나님은 어떤 인간들 놓고 "이 중에서 누구를 택해서 천국보내지, 자 이 중에서 누구를 보내서 지옥 보내지?"라는 선택을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가 아예 없는 마당에서는 조직신학적 선택설은 성립조차 안된다. 그러니까 에베소서 1:4에 나오는 선택설은 그런 대상을 존재함을 놓고서 선택하는 그런 선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슨 선택인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신 일의 내용과 성격에 관한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바로 천국과 지옥에 갈 사람을 선별하는 일이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받드신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이 본문에서 '내게 주신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아버지가 주신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아들 되시는 본인이 받들어 구원되도록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65도 마찬가지 내용이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여기서도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진해서 예수님께서 올 방도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임의로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구원될 자를 뽑을 수도 없다는 말도 된다.

요한복음 5:21의 본문은 마치 아버지의 뜻과 무관하게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특정인을 구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그러나 요한복음 17:6에 보면 '아들이 원하는 자들'도 역시 아버지의 원하는 자 범위 안에 있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이 본문에서도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라는 대목에 이어 '네게 주셨으며'라는 대목이 이를 증거해 준다.

이 내용을 합쳐 보면 마태복음 11:27이 된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들의 소원이 곧 아버지의 소원이요 아버지의 소원이 곧 아들의 소원이다. 따라서 에베소서 1:4의 '창세 전'이라는 표현은 '창세 후'를 의식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과 할 일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피조 세계에 진입하여 거기서 생겨난 일을 근거로 장만한 선택적 활동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①과 ②를 놓고 상호 순서 지을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무관하게 따로 떼어 놔야 합당하다.

타락전 선택설에서 주장하는 식으로 ①이 먼저 있고 ②가 실시되는 이런 식으로 연결지울 수 없다. 에베소서 1:4의 말씀은 창조의 내용과 성격에 관한 설명일 뿐이다. 아니 선택한 대상이 될 사람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는데 무슨 선택이 가능한가 말이다. 에베소서 1:4의 말씀은, 기관차처럼 뒤에 뭔가 달고 나올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예 그것을 차단해 버린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완성이기 때문이다.
타락후 선택설도 문제가 있다. 창조되어 버렸는데 무슨 새삼스럽게 창조 내용을 채운다고 부산을 떠는가? 아니, 애초에 하나님께서 아무런 내용도 없이 무작정 창조에 나서보자는 식으로 천지를 창조했는가? 장난치나? 이것은 에베소서 1:4의 '창세 전'이라는 표현을 전혀 안본 걸로 여기는 안면 몰수 정신이다.

이처럼 타락전 선택설이나 타락후 선택설에서 주장하는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에베소서 1:4의 선택 개념과 다르다. 조직신학의 선택 개념은 구원론에 근거한 것이고 에베소서 1:4이나 요한복음 15:6에 나오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됨을 증거하기 위한 계시론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순서 지으면 이렇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어떤 구원계획을 받았을까?

①천지를 예수의 선택적 일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골 1:16/창 1:26) ②예수님의 선택적 일을 증거하시기 위해 범죄한 인간에게 찾아오시고 ③언약을 제정하시고 ④언약대로 육신이 되시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⑤예수님의 선택적 일을 증거하고 열매맺기 위해 성령을 택한 자에게만 보내신다. 바로 이런 해석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구약 성경 전부로 보고 있었지만 그 말씀들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식으로 해석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 구원, 인간 구원론적으로 접근할 줄만 알았지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범죄한 것에 대해 예수님이 관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죄 짓도록 허락하는 바는 예수님이 구태여 실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이 범죄하도록 허락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라는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하실 일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시고 나머지 사람을 지옥불로 보내는 심판자의 역할만 하시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두움을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요(사 45:7) 악마가 설치도록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데 (살후 2:11) 예수님이 여기에 대해서 책임이 없는가? 그것은 하나님조차 이 모든 활동이 오직 예수님을 주로 높이게 하기 위한 방안이다. (살후 2:14/ 빌 2:9-11/골 1:16-17/ 엡 1:10,14) 이처럼 성경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심지어 하나님조차 그러하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1,5)

바로 이렇듯 자기 영광이나 자기 구원보다 오로지 아드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 성령을 받은 자 뿐이다. 육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육으로는 기껏 유대교처럼 신과 자신을 연결할 지식만 찾을 뿐이다. 여기서 나온 열매가 바로 타락전 선택설이요 타락후 선택설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한 번 선택받은 자가 도중에 타락하면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점도,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그런데 만약에 자기 구원론적으로 접근하려는 자가 있다면 이 자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저촉이 된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그러니까 이 구절을 같이 들여다 봐도 예수님 행함 중심으로 보는 자들은 이 구절의 내용과 내막을 알고 있지만자기 구원을 위해서 들여다보는 자는 바로 이 구절 내용이 곧 그에게 족쇄를 더욱 더 세차게 채우는 식의 해석을 낳는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뿐아니라 하늘의 은사라든지, 성령이라든지, 선한 말씀이라든지, 내세의 능력 이 모든 것이 결코 자기 구원용으로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런 은사는 개인 구원용이 아니라 (개인 구원용 같으면 타락이라는 개념, 선이라는 개념, 악이라는 개념이 다 틀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를 외면하고 그 자리에 자기 행함을 삽입시킨다.) 오로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주어지는데 그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진정으로 구원되지 못할 자를 구분하고 가려내는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어느 성경 말씀이든 자기 구원 확보용으로 접근해서는 해석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행하심을 근거로해서 히브리서 6:4-6의 말씀을 해석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근거로해서 볼 때에 너무나도 완벽하고, 치밀하고, 빈틈이 없고, 봐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자들은 로마서 8:30을 고맙게 여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반면에 구원론으로 히브리서 6:4-6 뿐만아니라 다른 성경 구절들을 보려는 자는 날이갈수록 불안이 깊어지고 그 안에서 떨게 되고 이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과도한 위선과 행함을 교회 내에서나 대외적으로 축적해서 행세하려고 하고 타인에게 전도할 때는 유대교적으로 더욱 더 행함을 부각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면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런 자들은 결국 십자가 복음의 완벽함에 반항하게 된다. 자기 행함의 끝이 본인은 너무나도 절감하고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 6:4-6의 말씀대에 의해서 나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유대교적 자기 본색을 드러낸 자들 위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이 저주와 함께 주어진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예수님의 언약의 피는 예수님만이 앞장세우고, 자랑하고 높이라고 주신 것이지 자기 구원용으로 소지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을 앞장 세우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얻지 못한 자이다. 아무리 삼위일체 신학을 정통하든, 조직신학의 대가든 상관없이 그런 것들은 신의 세계를 기웃거리면서 자기 구원받았음을 행함으로 확인하려고 시도하는 인간들의 '죄 가리개'에 불과하다.

하나님마저 아들에게 관심을 갖고 높이는데 치중해서 성령을 보내시는데 어떻게 성령받았다고 자처하면서 십자가 앞에서까지 자기 행함의 성과나 의를 부각하려 할까? 그 해답은 다음의 구절이 알려 준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여기에 보면 분명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다, 부르심을 입지 않는 자는 십자가 사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할 줄로 모른다. 사실은 이것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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