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의 의미 > 기독교 귀신 질병치유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고후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의표적과 기적이 있는교회

믿음과 사랑의교회     영혼구원하는교회

 

킹덤빌더교회후원: 기업은행 238-044092-01-012 이상열

 

기독교신앙상담:이상열목사 010-3438-1859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사 우리를 영광스런 아버지 나라로 데려가십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로운피조물 고백선포기도

1.나는 새로운피조물로서 하나님의본성과 생명을 가지고있습니다.

2.나는 하나님의걸작품이며 하나님의 의로 의로워졌습니다.

3.나는 죄로부터 깨끗히 씻겨졌습니다.

4.나는 어둠에권세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5.성령께서 내안에 거하십니다.

6.그리스도 예수안에있는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7.나는 생명안에서 다스리는자입니다.

8.나는 의인입니다.나에게는 더이상 정죄가 없습니다.

9.치유와건강 번영 형통 기쁨은 나의것입니다.

10.나는 모든일에 승리하는자입니다.

11.나는 아가페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12.성령님과 동행하는 나에게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13.나는 아가페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14.내안에는 믿음이 있고 나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킹덤빌더교회후원: 기업은행 010 3438 1859 이상열

하나님의 걸작품 


하나님의 걸작품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감사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하나님의 출발점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손과 발이다
나는 하나님사랑의 산물이며 위대함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중요한 사람이며 가치있는 존재이다
나는 새언약의 일꾼이며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멋진인생을 산다
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았기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왕노릇한다
나는 십자가신앙과 부활신앙위에 보좌신앙으로 다스리며 살아간다
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았다
나는 생명과 경건에속한 모든것을 받았다
만물이 나의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며 축복 그 자체이며 축복의 분배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 곧 자비와 은혜와 사랑과 의를 나누어 주는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밖으로 나오는 통로이며, 나는 세상을 향해 뻗으신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다
나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자이며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다
나는 남을 세워주고 격려하며 축복의
말을 하는자이다
나는 예수이름으로 승리하며 정복하며
통치한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지음 받은 독특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나는 아름답고 위대하며 보배롭게 창조되었다
나는 생명과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다
나는 능력과 부요를 위해 창조되었다
나는 성공과 번영을 위해 창조되었다
나는 존귀함과 신성함을 위해 창조되었다
내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제한이 없고 영혼을 치유하며 세워주고 축복한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달된다
나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과 의와 탁월함과 통치로
살아간다
나는 구원받았고 영생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은혜로 살아간다
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믿음과 은사를 가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
나는 가치있고 소중하며 중요한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존중 하시는 것을
나도 존중하고,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을 나도 가치 있게 여긴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으시고 신뢰하신다
나는 고귀한 하나님 왕가의 일원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과 나를 위해 값을 치르셨다는것을 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나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
나는 하나님의 창조의 왕관이며 모든 피조물중에 최고이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며 형상이다
나는 하나님의 독특한 보물이며 값진진주이다
나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이름으로 한다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으로 살아간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며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다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상속자다
나는 영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이다
나는 메뚜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사이다
나는 차고 넘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것을 받았다
나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위에서 왔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권세와 권능으로 상황과 환경을 다스리고 통치하며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다
나는 영혼구원자다
나는 하나님의 의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앞에 아무런 정죄감이나
열등감없이 설수 있다
나는 치유자이다
형통과 번영은 나의것이다
건강과 부요도 나의것이다
나는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간다
나는 죄사함을 받았다
나에게 정죄함이 없으며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다
나는 고귀하고 존귀하며 겸손하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나는 거룩하고 의롭다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것을할수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결코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간다
내안에 계신 성령께서 마귀보다 크시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넉넉히 이긴다
나는 강하고 담대하다
나는 부요하고 건강하며 신성한 생명으로 살아간다
나는 용서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
나는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과 하나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간다
나는 약함과 패배와 가난과 질병을 거부한다
나는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간다
나는 복음을 전파하며 영혼을 이겨오는 자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나의 모든 쓸것을 채우시리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나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
나는 독특하며 특별하고 우월하다 나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이다
나는 특별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가운데 첫째요 최고이다. 나는 신성의 탁월함과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선전하도록 부름받은 하나님의 가장 보배롭고 훌륭한 소유이다
나는 정복자보다 나은 자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씨이다
나는 성공이다
아픔을 없애고, 질병을 물리치며, 마귀를 쫓아내는 하나님의 생명이 나의 모든 존재와 몸의 모든 뼈와 혈액세포에 있다
나는 복을 받은 자일 뿐만 아니라 복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누어주는 자이기 때문에 내가 만지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가난대신 부요를 주셨고
질병대신 건강을 주셨고 죽음대신 영생을
주셨다
나는 주는자이며 헤아리고 심는자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하시며
모든것에 넉넉하게 하여 착한일을 하게하신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쓸것을 채우신다
예수가 가난하게 되심은 나를 부요케 하심이다
예수가 오신것은 나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다
나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의뢰한다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것을 할수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이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다
나는 믿는자이므로 이런표적이 나에게 따른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자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한다
내가 땅에서 매는것은 하늘에서 매이고 내가
땅에서 푸는것은 하늘에서도 풀린다
그러므로 주 예수이름으로 나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결박하노라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결박하고 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결박하노라

------

기독교 귀신 질병치유

찬송의 의미

페이지 정보

작성자 킹덤빌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134.114) 작성일16-02-15 08:35 조회349회 댓글0건

본문

찬송의 의미

서론
오늘날 찬송이라고 부르는 노래들이 진정한 찬송이 되지 못한 채 아무 가치 없는 음악으로, 단순 소음으로, 하나의 기분전환의 도구로 자꾸만 전락되어 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찬송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어떻게 찬송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지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복음의 눈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별을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복음적이고 어떻게 해야 복음적인 것이 되는 지에 대해 캄캄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하기를 지금 전국적으로 찬송이 회복되고 있다고 들 합니다. 그러나 회복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붐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더 나쁜 표현을 들자면 유행의 물결 같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찬송교육이 필요한 때입니다. 찬양예배를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것보다 먼저 올바른 찬송관을 심어줘야 합니다.
기독교 문화 창달(Christian Contemporary Culture Creation)이라는 그럴듯한 미명 아래 아무 생명 없는 예술의 빈껍데기로 성전을 채우고 성도들의 심령을 황폐한 돌짝밭으로 만들어서는 아니되겠기에 하는 말입니다.
찬송이란 무엇인가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에 보면 각종 은사는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목사님들이 특허를 냈거나 개발해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그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신학교를 나왔느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아울러 직분과 영성과도 비례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찬송의 의미
저에게는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의 감격이 없는 생활, 기쁨이 없는 표정, 찬송이 없는(너무나도 형식적인) 예배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서는 과연 찬송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다른 것은 잘 모르겠으되 찬송하는 것만큼은 한국교회가 철저히 비 성서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예외적인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만 대부분 유교적이고, 불교적인 그릇된 가치관으로 찬송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경건의 방법이요 주님 앞에서 공인된 유일한 예배인양 무서운 아집에 사로 잡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교회내에서는 "주찬양 선교단"으로 부터 시작된(?) 잔잔한 찬양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물결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커다란 해일이 되어 이 강산을 뒤덮었습니다. 기독교 서점마다 각 선교단, 복음성가 가수의 TAPE들이 넘쳐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찬송의 세속화" 입니다.
오늘 날 많은 기독학생들이 일부 "찬양 사역자 --- 구약 시대에는 찬양대를 레위지파가 예배, 제사와 함께 맡았음 ---"들을 우상처럼 뒤 따르고, 예수 공연 전문가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가사 내용은 안중에도 없고 리듬이 경쾌하기만 하면 춤추는 데 정신을 다 빼앗기는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찬송의 꽃은 피었으나 향기가 없고 바울의 고백보다 진한 외침은 있으되 찬송의 삶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고 세상잔치, 교회잔치로 끝나버리는 소용없는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온 교회는 찬송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학문적이 아닌 하나님과 나 와의 관계에서 과연 찬송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를 바로 알고 그분이 원하는 방법대로 드려질 때에 비로소 그 찬송은 하나님 보좌 앞에 향연으로 피어오를 것입니다.
찬송의 문자적인 의미
"찬송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성도들은 "곡조 붙은 기도"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정답일까요?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찬송은 결코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기도의 요소도 있습니다만 기도의 한 부류로 분류하면 안 됩니다.
찬송의 문자적인 바른 해석은 "하나님의 덕을 칭송하는 노래"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합니다. 시대와 형식의 구별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권능을 높이는 모든 노래를 일단은 총체적으로 찬송이라 부르면 됩니다. 또한 우리 성경에는 찬송(찬송)이라는 단어와 함께 찬미(찬미),찬양(찬양)이라는 비슷한 단어가 쓰여지고 있는데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필자 주: 일본의 경우 성경에는 찬송이라는 말이 없고 우리의 찬송대신 찬미라는 말로 전부 표현되어 있습니다.)
1. 찬송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대다수의 기성세대들에게는 찬송에 대해 잘못된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음정이나 박자, 리듬감이 없다는 소위 기능적인 면의 부족함을 들어 찬송은 음악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고 자기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다는 선택사항적인 그릇된 사고가 팽배 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찬송을 취미로 여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여러분 취미란 무엇입니까?
취미에는 결코 강제성이 없습니다. 또 그것은 철저히 자신의 정서를 위한 것일 뿐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찬송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는 단호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코 사사로운 권면이 아니라 명령적임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이사야43:21)
그런데 그 동안 기성세대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찬송은 성가대원들만의 전유물이거나 아니면 재능 있는 젊은이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자신은 찬송의 은혜 즉, 찬송의 달란트를 받지 않았다고 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찬송은 결코 특정인에게만 주어지는 은혜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시 33편 1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이 말씀을 역설적으로 해석하면 무슨 뜻이 될까요. 그것은 바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찬송하지 않은 성도는 불량한 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주위에는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지 않는 불량한 자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찬송은 우리 성도의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요 기본적인 의무임을 분명히 못 박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부디 찬송을 생활화 하십시오.그것은 우리가 이 땅위에 존재하는 이유요, 우리를 이곳에 보내셔서 어느 기간 동안 머물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2 찬송은 믿음의 꽃입니다.
꽃은 꽃이로되 계절을 가리지 않는 꽃. 밤, 낮을 가리지 않는 꽃, 그 향기가 온 세상을 진동하고 하나님 보좌에 까지 이르는 꽃.
그것은 바로 찬송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전설적이요, 환상적인 꽃을 피우고 가꾸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토양이 있어야 하고 희락이라는 수분이 항상 적당하게 공급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이 꽃의 씨앗은 결코 돈을 주고 살 수가 없습니다. 권세를 이용해 빼앗을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 속에 무엇보다도 이 꽃이 활짝 피어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찬송은 세상적인 자로서는 결코 잴수없는 믿음의 분량을 측정 할 수 있게 합니다. 왜냐하면 생활 속의 찬송은 그것이 곧 믿음의 유,무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구요?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을 때, 희락이 없을 때, 감사가 없을 때 그 때 과연 여러분의 입술에 찬송이 있었던가요? 결코 그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찬송은 믿음의 여러 요소들로 인한 증세이지 믿음의 요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믿음이라는 토양위에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찬송의 꽃이 피어나는데, 그래서 찬송은 믿음의 꽃이라는 말입니다. 예배 중에야 누구인들 찬송을 못하겠습니까. 생활이 풍요할 때에야 누구인들 감사치 못하겠는가 그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욥의 경우처럼 엄청난 환란 가운데 놓였다면 그래도 찬송하고 감사할 수가 있었을까요?
아마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3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여러분 찬송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처음 듣는 말이라구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찬송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신앙인들의 노래?
예배를 돕는 노래?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를 찬송은 신앙인들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신앙심을 일깨우는 노래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찬송이 성도들의 정서에 유익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울러 예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심령을 평안케 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구요? 앞에 열거한 그런 현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찬송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부수적인 소득(?) 즉,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지 찬송 자체에서 나오는 어떤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그 동안 찬송을 너무나 많이 왜곡시켜 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교회에서는 찬송을 쓰다버린 걸레 자루처럼 방치해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목적을 위해 찬송을 도구화하기가지 했습니다. 흔히 기도원이나 부흥회를 하는 교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찬송 도취증입니다.
찬송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찬송은 그저 찬송일 뿐입니다. 그래서 가장 순수한 동기에서 불러야 합니다. 어떤 교회 장로님은 주일날 성가대원(제 의견으로는 성가대보다는 찬양대라는 것이 성경적이라 생각됩니다만)들의 찬송을 자신이 심사위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늘 평가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 곳이라도 틀리면 성가대원들에게 왜 죽을 쒔냐고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장로님에게는 틀리지 않고 제대로 하는 찬송은 밥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죽이나 누룽지가 되는가 봅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인 것은 많은 성가대원들 자신이 그 장로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찬송이 끝난 후 성도들이 아멘으로 힘차게 화답하면 흐믓해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속으로 '에이 오늘도 죽 쒔나 보지 '?
왜 그런 생각이 들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아니라 예배의 분위기를 위해서 즉 성도들을 의식해서 선곡했고 또 그런 자세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요즘 젊은이들(필자인 저 자신도 포함해서)은 대개 찬송을 자신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즐기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어떤 찬송을 받고 싶어하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내 취향만을 우선하는 경우입니다.
이 역시 찬송이 예물임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 뜻없이 하는 행동들입니다.
한 마디로 찬송을 예물로 생각하지 않고 신앙인의 정서와 예배 분위기를 위한 보조 수단정도로 인식해 온 한국 교회의 일반 적인 찬송 가치관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왜 찬송이 예물이 되는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찬송의 시작은 하나님의 명령에서 부터 비롯 되었습니다. 아울러 그 명령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찬송 받기를 기뻐하고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찬송은 우주 공간을 울리는 메아리가 아니라 주의 보좌 앞에 피어나는 향연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가운데 다윗은 찬송인이요, 오늘 우리들의 찬송 지휘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찬송교사로서 여러가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예로써 그가 한 찬송의 내용을 깊이 상고해 보면 어느 것 하나 결코 허공을 향한 탄식이나 외침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지금 자기 자신을 인도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4 찬송은 복음의 나팔입니다.
앞에서도 말씀했습니다만 우리가 찬송하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찬송하는 과정속에서 발생되는 몇 가지 현상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 첫째로 우리는 찬송에 담긴 복음의 능력과 그로 인해 얻어지는 선교의 열매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 많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물론 그 소리 가운데는 유익을 주는 어떤 음악이나 새로운 정보가 있을 수도 있고 단순 소음으로 괴롭힘을 주는 공해도 있을 것입니다.
찬송도 그 가운데 하나의 소리입니다.
여러분이 잘아는 데로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모든 찬송이 소리로 표현됩니다.
아울러 소리로 표현된 찬송은 그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튼 그 울림 반경내에 잇는 사람은 자기 의사와 상관 없이 들려오는 찬송의 소리를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찬송의 선교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여러분 중 누군가가 오늘 직장에서 일을 하다 잠시 휴식하는 가운데 작은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몇 사람의 동료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고 아울러 가정해 봅시다. 처음에는 자기들 끼리 무슨 말을 주고 받다가 찬송이 계속되자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서 차츰 찬송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찬송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말씀 그 자체를 선율에 담았거나 아니면 복음적인 고백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찬송은 복음이거나 복음의 해설처럼 들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복음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육신의 한계, 상황을 초월하여 부르는 찬송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좋은 예를 요한 웨슬레(감리교의 창시자)의 선교 여정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신대륙(미국)에 있는 이교도 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오클레소프 장군이 이끄는 조지아주 이민단의 소속 목사로 1735년 10월 중순 그리 큰배가 아닌 Thymonth호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중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으로 인하여 요한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찬송의 소리.
바로 함께 승선하고 있던 26명의 모라비아 교도들의 평안에 넘치는 찬송의 소리는 선교사라고 뽐냈던 요한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으며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날의 체험을 "오늘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날중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날"이라고 기록해 두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사건입니까.
이처럼 찬송의 선교적 의미는 크고 아름다운 복음의 나팔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주님게로 인도하는 도구인 반면에 그 동안 수없이 외쳐왓던 복음의 능력을 확증해 보이는 시험이기도 합니다.
5 찬송은 성도의 서원과 결단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일 부르고 내 평생에 불러야 할 이 노래가 내 자신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부르는 찬송의 내용은 정말 대단합니다. 너무나 진실한 신앙의 고백이요, 뜨거운 선교의 열정에서 작시 작곡 되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찬송을 하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찬송하는 소리만 들어보면 이 땅 위에 사도 바울이 수백만이요, 베드로 야고보가 그렇게 많은데도 생활 속에서는 좀처럼 신앙의 거인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분명히 찬송이 예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요, 모두 다 기억해 둘만한 사랑의 고백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는가 말입니다.
초대교회에 보낸 주님의 메시지를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의 행위를 아시는 주님이 오늘 우리들의 행위를 보실 때 과연 찬송으로 여길만한 삶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을 너무 많이 기만했고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 왔기 때문입니다.
혹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몇 곡의 찬송을 그 예로 들어봅시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23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 하겠네.}
이 찬송은 청소년층보다 장년들이 더 많이 부르는 곡입니다. 설령 입이 만개가 있다 할찌라도 그 입으로 죄를 짓거나 망령을 부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찬송하는데 쓰겠다는 고백이요, 우리는 이 찬송을 즐겨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 우리들의 입술에서는 과연 찬송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만 개는 커녕 한 입을 가지고서도 주님을 찬송하고 덕을 세우기 보다는 의롭지 못한 저속한 언어로 얼마나 몸과 마음을 더럽혔는가 말입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23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 주니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샘이로다.}
참으로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이 시대에 활자화된 말씀이 없었다면 인류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할 때 성경에 대한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되고 아울러 말씀을 자유롭게 대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성경 읽기를 싫어하는지 저는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마치 방송 모니터라도 되는 듯 TV는 매일 일삼아 보면서 성경 한 장을 읽지 않고 하루해를 보내는 주부들이 그 얼마며, 신문은 그토록 즐겨 읽으면서도 말씀 한 구절을 묵상하지 않은채 한 주간을 보내는 가장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이왕 신문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즉 매일 신문을 읽듯이 성경을 보면 한달에 성경을 1독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백성들을 어리석음의 골짜기로 몰아넣고 성도들의 심령을 흐리게 하는 스포츠 신문의 크리스챤 독자(?)들이 그 신문을 거부하고 그 손에 성경을 들고 다닌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달라질까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예배는 비교적 열심인데 정작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파워가 없고 깊이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생활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자기 나이만큼은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나이 만큼이라는 말에 너무 겁먹지 마십시요. TV시청 시간을 대폭 줄이고 잡스런 글을 읽지 않으며 부질 없는 일에 시간을 뺏기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355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이 찬송을 부를 때 마다 주님의 두 가지 표정을 바라봅니다.
하나는 감격의 표정, 또 하나는 슬픔의 표정.
왜냐구요?
사실 어느 찬송인들 주님이 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만 특별히 이 찬송은 그 헌신의 깊이가 더 하고 사랑의 농도가 진해 이 곡을 부르는 제 자신의 가슴도 뜨겁거늘 하물며 그것을 듣는 주님의 마음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이거야 말로 사도 바울이나 할 수 있었던 고백이요, 비운의 왕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간신 김질의 밀고에 목이 잘린 사육신들이나 품을 수 있었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국 성도들은 이 찬송을 모두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 한국교회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 베스트 10곡을 꼽으라면 이 찬송은 언제나 그 순위에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이 찬송을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한국성도들의 신앙고백을 사도 바울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 셈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기뻐하시다가 이내 슬퍼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과연 우리의 마음이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라고 큰 소리쳐 외치지만 한번 복음을 전해보고 듣지 않으면 속으로 지옥이나 가라고 미워하지는 않았는가 말입니다. 심지어는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복음전하겠다는 사람들이 과연 내 이웃, 직장 동료들의 마음을 몇 번이나 두드려 봤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102장)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 찬송은 만큼은 굳이 제가 예를 들지 않겠습니다.
그대신 여러분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이 찬송을 부르며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은 과연 어떻습니까?
삶의 모든 가치와 기준과 그 쓰임들이 과연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이 찬송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날 주님을 슬프게 했을까요.
이 찬송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 3계명을 어겼을까요.
세속사회에서 도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을 가장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하는데 하물며 거룩한 백성들인 우리가 어찌 찬송으로 주님을 욕되게 하고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임을 자처해야 하겠습니까.
찬송과 생활은 일치해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하기 위하여 몸부림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디 찬송은 여러분들의 사명임을 명심하십시오.
결코 취미이거나 선택사항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찬송이야 말로 믿음의 꽃이요, 가늠자요, 확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아무리 믿음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라도 시험중에 찬송하지 못하면 그 믿음의 본질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이제 또한 여러분은 찬송이 예물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예물은 예물답게 항상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드리는 대상을 제발 혼동하지 맙시다.
찬송이 또 무엇이라고 했던가요?
네 복음의 나팔이라고 했군요.
찬송의 선교적 의미 그 가치가 대단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선교하기 위해 찬송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끝으로 찬송은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이자 결단의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서원과 결단은 항상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간구하고 스스로 낮아져야 함은 말할 것도 없구요.
이제 여러분에게 있어서 찬송은 더 이상 옛 노래가 아닐 것입니다.
부를 때 마다 새롭고,
부를 때 마다 뜨겁고,
부를 때 마다 축복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찬송 합시다.

할렐루야! 

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기독교 귀신 질병치유 목록

게시물 검색

 

 




Copyright © 소유하신 도메인.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