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셈족(West Semitic)에 해당하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가나안 사람들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자연계에 있는 여러 요소들을 신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상정해 놓고 그들이 인간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연계 안에 있는 다양한 힘들에 대하여 무기력함을 느꼈고, 그래서 그러한 힘들에게 의존하는 태도야말로 안정된 삶을 가능케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특히 가나안 땅이 사막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비가 충분하지 않았던 데다가 큰 강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은 비와 관련된 풍요와 다산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비와 관련된 신들이 그들의 종교와 신앙의 중심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신이 바로 바알(Baal)이라는 별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천둥과 번개의 신 하닷(Hadad)이다.
우가릿 북쪽 지역의 언덕배기에 자신에게 봉헌된 큰 신전을 가지고 있던 바알은 농사를 잘 짓게끔 비를 내려주는 폭풍우의 신(storm-god)이요, 지상 세계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두무지(탐무즈)나 이집트의 오시리스처럼 죽었다가 살아나는 신이요, 지상 세계의 기근과 가뭄(죽음), 그리고 풍요와 번성(부활)을 대표하는 신이었다.
한 손에 곤봉을 들고 다른 손에는 번개창을 들고 있는 바알의 모습.
바알이 이처럼 가나안의 신들 중에 가장 활동적으로 움직이면서 풍요와 다산의 기능을 가지고 있던 것과는 달리, 가나안 만신전의 우두머리인 엘(El)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 우주 만물을 창조한 신으로 숭배되었지만, 바알처럼 지상 세계에 비를 내리는 신이 아니었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도 아니었다.
이는 그가 바알이나 다른 신들처럼 지상 세계에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 폭넓게 숭배되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엘의 풍요 기능이 이처럼 약했던 까닭에, 그의 배우자인 아티랏(Athirat)의 풍요 기능에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아세라'(Asherah),1) 로 불리기도 하는 아티랏은 엘과의 사이에서 70여 신들을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신들의 어머니로서 신들과 방백들에게 젖을 물리는 자, 곧 그들의 양육자로 나타난다.
아티랏 외에도 아스타르테(Astarte)와 아낫(Anat)이라는 두 여신이 있다.
이들은 공히 우가릿 문헌에서 바알의 배우자로 나타나는데, 수메르의 이난나와 바빌론의 이슈타르에 해당하는 아스타르트는 우가릿 문헌에서 아낫 만큼이나 중요한 바알의 배우자로 나타나지는 않으나 페니키아 문헌과 구약성서에서 바알의 배우자로 자주 언급되고,2) 이슈타르와 마찬가지로 전쟁과 풍요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그리고 우가릿 문헌에 나오는 여신들 중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면서도 구약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아낫3) 역시 아스타르테처럼 전쟁과 풍요 및 사랑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이 외에도 바알의 아버지로 알려진 곡물의 신 다간(Dagan 또는 Dagon) 역시 풍요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풍성한 곡물 수확과 그로 인한 지상 세계의 풍요에 책임을 지고 있던 다간은 악카드 왕국의 사르곤 이후로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마리, 팔레스타인, 페니키아 등지에서 폭넓게 숭배되어 왔고,4) 특히 북부 시리아의 에블라 지역에서는 최고신으로 숭배되기까지 했다.
각주
1) '아세라'는 아티랏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2) 아스타르트는 구약성서에서 단수형인 '아스도렛'(열왕기상 11:5, 33; 열왕기하 23:13)으로 표기되거나 복수형인 '아스다롯'(사사기 2:13; 10:6; 사무엘상 7:3-4; 12:10; 31:10)으로 표기된다. 본래 단수형 '아스도렛'은 히브리어 '수치'(보솃, shame)의 모음을 집어넣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