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질병과 예수 - 욥기를 중심으로 해서 > 기독교 귀신 질병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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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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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21장3절4절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인 새로운피조물 고백기도

 

나는 영생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사탄을 정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나는 믿음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되었습니다.나는 거룩한자입니다.

나는 모든것을 탁월하게 할수있는 은혜가 있습니다.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며 하나님의 생명과본성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영생은 나의것입니다.의는 나의것입니다.

죄를 죄거함은 나의것입니다.구원 구출 해방 자유는 나의것입니다.

치유와 신성한건강은 나의것입니다.형통은 나의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권세를 가지고있습니다.나는 아가페 사랑을 할수있습니다.

나는 지혜가 있습니다.나는 상황을 바꾸며 항상 승리하는자입니다.

나는 내인생의 선지자입니다.나는 영혼구원자이며 킹덤빌더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사 우리를 영광스런 아버지 나라로 데려가십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개혁)킹덤빌더교회목사 이상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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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질병과 예수 - 욥기를 중심으로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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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킹덤빌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134.114) 작성일16-02-14 19:25 조회295회 댓글0건

본문

인간의 질병과 예수 - 욥기를 중심으로 해서

 
 
구약 성경 욥기는, 악마에게 노출된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악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과연 계속 의로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즉 인간은 과연 궁극적으로 악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면 인간은 오직 악에게만 철저하게 종속된 존재일 뿐이다. 인간들이 평소에 악에게 대항해 왔던 정신이 욥의 친구들을 통해서 펼쳐진다.
그런데 실제로 악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욥의 안목에서 볼 때, 그러한 대처 방법은 올바르지 못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와 선행의 관점에서 볼 때에 욥은 전혀 해당자가 아니었다.
욥은 악에게 지지 않고 살아온 자이다. 그런데 그 욥에게 재앙이 떨어진 것이다. 여기서 재앙과 악과의 관계가 어수선해 진다. 욥에게는 불굴의 의지가 있다.
고통 가운에서도 죄 짓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최후로 그는 자기 목숨까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가 잦아서 마름 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겠나이다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 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욥 14:7-22).
육신의 아픔을 통해서 욥은 자기의 본질 자리로 되돌아가게 된다. 목숨까지 동원해서라도 죄짓지 않기를 하나님께 호소할 뿐이다.
욥의 신음 소리 안에서 이 땅 위에서 살다간 모든 인간 행렬의 최후가 묘사되고 있다.
욥에게 일어난 육신의 병과 고통은 사단에게 노출된 인생사를 말해 준다. 모든 인간은 보편적 운명을 지녔다.
병과 고통이 결국에는 죽음과 연결된다. 즉 욥은 자신의 병과 고통과 궁극적으로 생명 포기와 관련시키는 것이다.
왜 재앙이 와야 하며 무엇 때문에 자기에게 덮쳤느냐를 자신이 목숨 경계선에 서서 재정립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뭔가 드러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재앙을 유발시킨 배후에 대해서는 그 내막을 알 길이 없어서 욥은 참으로 답답해한다.
그저 자기 육신을 쥐 뜯으면서 하나님에게 자신의 순전함을 호소할 따름이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훗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 19:24-27).

욥의 친구들이 내세우는 선과 악의 기준을 들으면서 욥은 더욱 고통스러워한다. -
"어린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 뿐이로구나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욥 19:18-22).
욥이 재앙을 만남으로서 욥의 평소의 의로운 행위를 악으로 간주해야만 뭔가 모순된 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모순된 평가 속에 욥은 둘러싸여 있다. 욥은 친구들의 불합리함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 그들은 아이들을 내어 보냄이 양 떼 같고 그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이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평강하며 안일하고 그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 골수는 윤택하였고 어떤 사람은 죽도록 마음에 고통하고 복을 맛보지 못하였어도 이 둘이 일반으로 흙 속에 눕고 그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욥 21:7-12, 22-26).
욥이 끊임없이 친구들과 논쟁을 하는 것 가운데서 욥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를 변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런 와중에서 자기 속에서도 새로운 모순점이 발생되었다.
자신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나란히 병행할 수 있는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욥은 참으로 낯선 상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살아왔던 방식으로서는 하나님이 새삼스럽고 낯설게 다가왔던 것이다.
과연 지금까지 구축해 왔던 인간의 지혜와 경험을 모조리 파괴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고수해야 하는가를 욥은 고통 가운데 요구받게 된다.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지혜를 총동원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상황이 욥에 일어났던 것이다.
알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 뿐만 아니라 해명해 낼 수 없는 지혜로 인하여 욥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참된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이 '알 수 없음' 속에서 다가옴을 욥은 공포 가운데서 체험하게 된다.
사실은 욥이나 사람들에게 아픔과 병이 일어나지 않었더라도 죽음의 세력은 늘 인간 주위에 상주해 있었던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인간들은 무지했다. 이것이 인간 지혜의 한계였다. 그 한계에 대해서 악마는 자신만만해 했던 것이다.
사단은, 인간이 지닌 고통의 한계점을 알고 있고 있다.
인간들의 불굴의 의지력과 명철한 지혜로 버티어 낼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악마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참으로 알지 못했던 바는, 생명의 진정한 근원이었다.
욥에게 비록 고통이 죽음 같이 작렬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욥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임을 욥은 알지 못했다.
욥은 고통과 죽음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욥은 재앙의 한계에 대해서 어두웠다.
죽어서 생명이 사라지게 되면 고통도 사라지는 것으로 보았다. 즉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분이 곧 자기에게 재앙을 주신 분으로 알고 있었다.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죽음도 초래하고 재앙도 초래하는 줄 알았다.
욥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누가 끼어 있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자기가 시험의 대상이 되고 있음도 알지 못했다.
혹시 악이 가로놓여 있다고 한다면 그 악과는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보았다. 남은 것은 오직 한가지 사실뿐이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자기에게 재앙을 주셨는가 하는 것이다.
욥의 이러한 생각은 자식들이 죽고 자기 재산이 날아갔을 때의 고백과 일관되게 동일하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10). -
이 두 가지 본문이 욥이 평소에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왔던 인생관이었다.
여기에서 욥은 분명히 고백하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했다.
재앙도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의인에게 재앙을 주시는 하나님?
이점이 욥이나 욥의 친구들에게 제대로 해석되지 못하는 점이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악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욥은, 의인에게도 재앙이 온다는 이 사실로 인해 평소에 욥 자신이 얼마나 큰복을 받고 누리면서 살아왔음을 재삼 확인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이제는 고난을 그만 내리시고 자기 생명을 거두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 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욥 7:14-21).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서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관련된 일로서 욥에게 고난을 허락한 것임을 모르고 있다.
즉 욥의 목숨이란 단지 욥 그 자신을 이 땅에 살게 하시겠다는 차원에서 주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악을 이기고 사단을 통제할 수 있는 지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욥에게 찾아오신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욥에게 안겨 준 고난 안에는, 악에 의해서 빼앗기지 않는 그런 생명으로서의 지혜였다. 욥은 스스로의 의로서 자기 생명을 지탱하는 줄로 알았다.
하나님의 지혜에 기초한 생명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주시는 분 혹은 빼앗는 분으로서의 하나님과 욥 자신의 의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욥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욥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자기 목숨을 자기 의가 아닌 다른 데서 오는 의와 연관지어야만 했다.
하나님이 욥에게 직접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단의 관계 속에 있는 지혜 안으로 욥을 초대하시려는 것이다. 지혜의 대결 안에서 욥에게 주어진 생명의 내막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만사가 오직 하나님의 의와 지혜에 의해서 창조되고 활동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려 하신다.
하나님의 의가 사단의 지혜를 이김으로 말미암아 욥은 그 동안 목숨을 부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욥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움을 근거로 해서 자기가 억울한 고통과 수모를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불합리성에 의의를 걸었다. 즉 고통 있음이 자기에게는 비본래적인 요소처럼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욥에게 목숨이 아직 붙어 있음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는 사단은 욥마저 자기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욥을 놓지 않는 한 그런 사단의 장담은 무용지물로 돌아간다. 욥의 친구들이 거론하고 있는 선과 악의 논리는 욥의 고통을 젼혀 해명해 주지 못했다. 악을 인간이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악의 내막을 모르고 있는 인간들 입장에서 그들이 새삼스럽게 의를 행사하고 악을 저지른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 보라 네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 35:1-8).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재앙도 오고 복도 온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이 세상에서의 악마의 역할을 전적으로 배제한 채 구상된 지혜에 불과하다.
하나님 허락 하에 악마에 의해서 저질러진 재앙에 대해 인간들은 그 원인에 대해 전적 무지몽매하다.
이 무지로 인해 욥의 친구들은 애매한 욥에게 그 모든 책임 소재를 찾고자 했고 욥 또한 그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리려 한 것이다. 이것이 욥의 잘못이다. -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욥 32:1-3).
욥의 젊은 친구 엘리후가 욥을 책망하며 나서게 되고 하나님마저 욥에게 찾아오셔서 바른 지혜로 가르친다.
엘리후는 욥의 취약점을 단호하고 끄집어낸다.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노라 하니 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훼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욥 34:5-12). -
이 본문에서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신다'라는 주장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의와 지혜는 하나님의 의와 상호 연결시킬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들의 지혜 속에는, 악마로 하여금 욥에게 재앙을 내리도록 허락한 하나님의 그 깊은 지혜가 아직 담겨 있지 않다.
즉 책임 소재 없이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서 인간은 무지하다. 인간의 지혜란 기껏해야 인간의 행위에 근거해서 자신들에게 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인식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인간성에 대해 악마는 하나님 앞에서도 확신하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욥 1:8-12, 2:3-6).
- 이 본문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사단은 인간의 행위와 복과의 관련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만약에 복을 철수해 간다면 욥의 행위도 달라질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장담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소유물과 건강이다. 과연 인간은 소유물과 건강을 상실하고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자신의 순전함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존재인지 그 귀추가 궁금해진다.
즉 재산의 증식이나 건강 회복을 자신의 순전한 행위와 결부시키지 않을 자가 과연 이 세상에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는 바로 지혜자이다. 지혜의 순수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자이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욥에게 다가서신다.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욥 38:36). 우주의 모든 창조물들이 같은 지혜의 보편성 안에 놓여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개개인이 중심이 되어서는 왜곡된 지혜밖에 안 나온다. 하나님이 허락한 환란 속에서 욥은,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던 악이 도출되고 말았다.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욥 36:21).
욥은, 착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생각에 위기가 발생했다.
자기 자신에게 혼란이 찾아 들었다.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겠는가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욥 30:24-26).
욥은 이 책임을 자기에게 돌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적용시켰던 원리 밖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세계 밖의 일은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도저히 못 벗어나고 있다.
욥에게 떨어진 상황은 인간의 극단의 한계점 드러내어 준다. 한 개인으로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인간이 내뱉을 수 있는 최후의 주장은 바로 이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0-14). -
욥의 이와 같은 주장은, 끝까지 자기 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태도에서 나왔다.
자기에게 일어난 현 사태에 대해 달리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욥의 자기 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불의하게 했다는 사실을 욥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 하다 하느냐"(욥 40:7-8).
욥의 생명 지속이 결코 욥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이점에 대해서 하나님을 뵙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욥의 생명 보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은 욥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그것으로 땅 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 일이 있었느냐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고 만물이 옷 같이 나타나되 악인에게는 그 빛이 금한바 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욥 38:12-18).
모든 것을 다 사단에게 붙여도 생명만큼은 꼭 쥐고 계셨던 하나님은, 욥에게 찾아오심으로서 생명 안에 담긴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하나님의 생명은 바로 악의 원천을 드러내게 만드는 잣대였던 것이었다!
욥은 계속해서 일의 전모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으나 자기가 의로운 것만 확실하다는 것이 욥의 주장이다.
그러나 욥이 지니고 있던 생명은, 그 생명의 본질을 위해 따로 쓸모가 있어 하나님이 지탱해 주신 것이었다.
욥은, 친구들을 위해 대리 기도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욥보다 정당하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욥을 통해 그들이 변화되기를 기대하셨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욥 42:7-12). -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임의로 주신 고난으로 말미암아 생명 문제를 걸고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직접 뵈옵게 되었다는 선지자적 상황 때문이다.
바로 지혜자가 가지는 특수한 선지자적 기능과 역할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욥의 목숨을 유지시킨 것은 욥의 의로움이나 행복을 위함이 아니었다.
원래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그런 목표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요나 선지자를 예로 들면, 요나서1:1-3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선지자는 죄악이 관영한 곳으로 출동해야 한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일이 인간의 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의 잘못은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된다.
하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면전을 피할 수 있다고 여긴 점이다.
즉 사명을 거부할 수 있다고 여긴 점이다. 다른 하나는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즉 죄로 인해 고난 받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통과 그 해소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바다 가운데서 버리고서는 다시 되살리신 이유는, 선지자는 결코 자기 사명에 충실해야 함을 말해 주시는 것이고, 더위로 고통 당하는 요나 선지자를 시원케하는 박넝쿨을 말라죽게 한 것은, 선지자로 하여금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선지자의 기능을 전제로 한다면 욥기에 나오는 욥의 위치도 이와 같다.
욥은 가족과 그리고 재산과 그리고 친구마저 상실했다.
여기서 그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최후로 남은 자기 목숨까지 가져간다고 지레 짐작한 것이다. 마치 도피하는 배 위에서의 요나의 생각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목숨을 지켜 주셨다. 그 다음의 문제로서, 욥은 자기 고통 중심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의로서는 절대로 이런 중한 고통이 올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지혜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욥을 선지자적 측면에서 다루셨다. 욥과 그 친구들간의 유대성 상실은 곧 인간들의 보편적 속성이 욥에게는 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단절된 특수한 생을 유발하시기 위해서였다. 인간이 스스로도 얼마든지 의로울 수 있다는 인식의 틀을 파괴시킬 필요가 있었다.
욥은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깨달아야 했다.
욥은, 친구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된 선악 개념과 복에 대해서 바른 지혜를 주기 위해 존재한 자였다.
바로 여기에서 욥이 친구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던 특별한 권한이 나왔던 것이다.
결코 욥의 상대적인 의로움이 아니었다. 사명이었다.
인간에게 도출되는 불굴의 의지가 전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이 되지 못했다. 도리어 이러한 인간성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발견해야 하는 자기의 원초적 무지성에 기인된 것이다.
지혜 밑에서의 인간의 연약성은, 자신의 생명조차도 자기 수중에 있지 않음을 통해서 확연해 졌다.
인간 세계에서 가용되는 선과 악은 욥의 고난에 대해서는 비실제적인 것으로 드러나 버렸다.
욥은 두 가치 차원에서 각자 다른 선악의 원리가 통용되고 있음을 체험했다.
선과 악에 대해서 뒤바뀐 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결국 서로를 정죄할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가야 했다.
인간 세계에서의 악은, 의로운 자의 대리 죽음의 의미에 어둡고 그 대신 오로지 자신들만의 선과 의를 변호하는 형식으로서의 의이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욥이 범죄함을 예견하는 사단의 태도는, 인간 세계가 이미 전혀 다른 선악 개념에 의한 지배당하고 있음을 기정 사실화 한데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과 사단의 대립이 인간 세계 안으로까지 이어져 현실에 적용시킨 것이 욥기의 줄거리이다.
과연 인간이 기존의 선악 개념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같은 하나님 앞에 있어도, 하나님에게 시비를 거는 사단의 모습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욥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1-6). -
회개하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자아를 드리는 욥은, 그 자체가 하나님 지혜의 산물이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반드시 회개를 유발시킨다. 이로서 참으로 지혜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구별된다.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각가지 변화는 하나님의 지혜로만 최종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에 무지한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움과 원망, 시기와 질투와 안목과 분쟁 같은 것들은 파산과 질병이라는 사회적, 육체적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허약한 지혜에서 야기된 현상들이었다.
인간은 각가지 변화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 변화에 대해서 순전히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한다. 변화는 하나님이 주셨건만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지 않기에 회개하는 심령으로 그 상황을 읽을 줄을 몰랐다.
바로 여기에 고난받는 자, 욥이 등장한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것이 이 고난으로만 해석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상실된 가운데서만 새로운 지혜는 쏫아나온다. 하나님의 지혜는 오직 의인의 고난 안에서만 발산되는 법이다. 의인의 고난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부인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오는 지혜는 참 지혜로서 부적당하다.
왜냐하면 기존의 인간들은 모두 상대와의 관계에서 기존의 선악 개념으로만 거미줄처럼 짜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체 안에서는 의인의 고난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을 뿐더러 따라서 세상사도 왜곡되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친구 관계나 부부 관계에 있어 하나님의 지혜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자기 지혜가 우선된다.
이런 선악의 관계에 치명적인 허점을 밝히기 위해 하나님은 욥의 운명에 고난을 발생시키도록 허락했다. 하나님과 비은혜 관계에 놓여 있는 악마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욥에게 일어난 이러한 상실의 고난은 도리어 주위 사람들에게는 자기 지혜의 상실을 파악케 한다.
그 동안 자신을 지탱해 왔던 거짓된 지혜들이 욥의 고난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져 버렸다.
바로 악마는 이런 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자기 의견의 관찰을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서 욥의 고난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된 것임이 드러났다.
하나님의 은혜의 관계가 선악 관계의 한복판에서 그 그물망들을 찢어 놓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인간의 선악적 관점으로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을 뿐더러 재물과 건강과 목숨, 이모든 것은 인간들의 선악 지혜로서는 도저히 추가적으로 획득될 수 없는 법이다.
만약 둘 다 인간의 지혜로서 유지하거나 추가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여기에는 필히 모순점이 발생한다.
악마는 이 인간 세계가 안고 있는 모순점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모순점을 이용해서 욥마저 꺾고자 했다.
자식이 죽고 재산이 날아갔으나 욥은 잘도 버티어 내었다. 그러나 혈육적인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내가 떠나고 친하게 지내던 친구마저 갈라서게 되고 서로를 정죄하게 된다.
남은 것은 욥 혼자 뿐이었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께 해명을 구하게 된다.
그러나 욥에 있어서 고난은 차라리 인간적인 선악 관계의 허물을 벗겨지는 계기로 보아야 한다.
그 동안 한평생 짊어져 온 큰짐을 벗어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있어 이 짐이 악마에 의해서 벗겨지는 것을 허용하셨다.
건강과 재물의 짐도 벗겨지고 그리고 자기 지혜의 짐도 벗어졌다.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지혜로 채워졌다.
이것이 회개이다. 지금까지 지난 날 욥을 풍성케 한 것의 원천은 바로 인간의 지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있음을 보이기 위해 모든 관계는 다시 회복된다.
재산 뿐 아니라 자녀와 친구와 아내 관계도 회복된다.
모든 것이 상실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만 들어온다면 모든 것이 이 지혜 중심으로 다시 회생된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욥의 고난은 여전히 주위 사람들의 뇌리에 잔재될 것이다.
인간됨의 참된 조건은 인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악마에게 빼앗길래야 도저히 빼앗길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그 지혜 안에 참된 인간됨이 들어 있었다.
만약 악마에게 쉽게 유린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허약한 조건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직도 불행에 예속되어 있는 자이다. 건강해야지 만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은 것으로 여긴다면 그 자는 병든 자이다.
진정한 고통이란 인간이 하나님 지혜 앞에 무지하다는 점에 있다. 과연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의 존재는 무엇인가?
하나님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비밀을 공개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고난 안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원천이었다.
그 어떤 불행의 조건과 악마의 시험에도 불구하고 흔들릴 수 없는 지혜의 산물로서 주어진 것이 생명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늘 질문해야 한다. "과연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할 타당성은 무엇인가?"
예수님과 병과의 문제도 이 물음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진정한 기적은 병나음도 아니요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욥의 회개와 같은 회개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기적이다.
이런 기적을 받은 자만이 성도요 참된 지혜자이다. 욥기는 바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인간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고난을 지닌 채 이 땅에 태어나셔서 결국에는 온 우주 만물을 자기 중심으로 통일되게 새 질서를 수립하시는 분으로 오셨다. 이 분이 바로 참 지혜자이신 하나님이시다.
이 지혜를 기준으로 해서 진정한 선과 악은 구별되고 또한 심판의 기준으로 적용된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시면서 고통에서부터 건져 주신다는 말은, "본래의 생명 공급자가 지금 이 자리에, 이 인간 세상 한 가운데 벌써 와 버렸다." 라는 점을 보여주는 계시이다.
병이라는 것이 창세 때부터 있었던 인간과 말씀(생명의 원천) 관계에 의해서 나타난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문제는 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읽어 내는 지혜와 안목이 인간들에게는 없다는 점이다.
이것을 요한 복음에서는 '어두움'과 '빛'의 관계로서 묘사하고 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3-4).
그리스도께서 병든 자와 접촉하시므로서 그 동안 인생들을 지배해 온 권세자와 결별될 수 있는 사태를 일으키시는 것이다.
병을 매개로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엘리사 시절에도 있었다. -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 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 5:1, 9-14). -
이 본문을 중심 해서 각가지 대비적 의미군들이 나타난다. 군대장관:계집 종/, 군대장관의 고집:종들의 간청/, 병고쳐주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왕 : 병고쳐주는 엘리사/, 다른 신을 섬겼던 군대 장관: 진심으로 다른 신 섬기기에 가책을 느끼는 군대장관/, 예물을 고사하는 엘리사: 예물을 청구하는 게하시/, 나음 받은 군대장관:문둥병 들린 게하시 등, 이러한 이항 대립들은, 문둥병이라는 난치병을 중심으로 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주제는 이것이다.
겸손하게 회개하고 긍휼을 바라는 자에게는 은총이 주어지고, 그렇지 않고 인간적 자기 행위에 근거해서 사는 자에게는 병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중심에서 벌어지는 병에 관한 표징은, 하나님의 심판의 매개이다.
즉 엘리사가 먼저 나아만을 찾아가서 병을 고쳐 주지 않았다는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엘리사는 이스라엘 선지자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지향해야 하고 마땅히 수행해야 될 주변 이방 나라에 대한 통치와 지배를 기본 취지로 하고 활동하게 된다. 그 정복과 통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람 나라에서 군대 장관이 한 명이 나온다. 그 자가 대결의 장에 나오게 된 것은 자신의 계집종의 말을 듣고부터이다. 그 계집종은 아람 군대에 의해 사로잡힌 채 군대 장관의 수종을 들고 있는 처지였다.
이 상황만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이 도리어 아람 군대에게 지배당한 셈이 된다.
더구나 아람 나라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군대 장관을 병을 고쳐 달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 왕과 그 내부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놓고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 치는 빌미로만 여겼던 것이다.
이 또한 이미 정복당한 이스라엘의 실정을 보여준다. 나아만 장군에 엘리사 앞에 와서도 장군은 엘리사의 명령을 거부한다. 요단강 강물이 다메섹 강보다 더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람 나라의 저항을 뜻한다.
군대 장관의 상식적인 안목에 대한 엘리사의 의도적 공격처럼 간주된 것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사실상 아람 나라의 굴복을 요청한 셈이다. 원래 그렇게 되어야 마땅한 그 원리를 엘리사는 양보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대 장관의 종들이 이번에는 나서서 자신의 상관을 설득시켜 요단강에서 몸을 씻게 한다. 이로서 다메섹과 요단강으로 대변되는 두 나라 사이의 위상이 제 자리를 찾아갔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전쟁이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사건과 맥락이 같은 것이다. 병고침이 이방 나라에게는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앞에 나아 와 패배를 스스로 자인하기를 요구하는 심판 행위이다.
아람 나라의 비거룩성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확인토록 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우월성을 아람 군대 장관 앞에서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만약 병이 낫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여전히 아람 나라 밑에 예속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마태복음 12:22, 28-30을 본다.
"그 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
예수님은 거룩한 전쟁을 하기 위해 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신 것이다. 이미 세력 잡은 자와 싸우기 위해서 일하고 계신 것이다.
병고쳐 준다는 사실이 곧 이미 이방 나라화 되어 버린 그 당시 유대 나라를 향하여 선전포고를 하신 증표였던 것이다. 즉 심판 행위였다.
개인적으로 어떤 병고침이나 긍휼의 혜택이 돌아간 것은 심판이기보다는 심판의 결과로 나온 구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차적 사명은 특정인을 구출하려는데 목적이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의 심판이었다.
병고침과 귀신을 내어쫓으면서 심판의 전쟁을 감행하신 것이다.
다시 엘리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군대 장관을 뒤따라가서 선지자 핑계 대면서 예물을 자기가 차지하고 만다.
여기서 문둥병에서 해방된 나아만 장군의 마음 상태와 처음부터 건강했던 게하시의 마음 상태를 서로 비교할 필요가 있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를 이미 경험했다. 단순한 병고침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혜택을 누리게 되었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
나아만 장군은 자신의 나라에도 신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신은 참된 신이 아니라 우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여호와와의 관계성이 이렇듯 병고침의 문제를 초월한 범주를 형성한다. 거기에 비해 게하시는 형식으로는 여호와의 나라 안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병고침에 집착되어 있다.
나아만이 어떤 이득을 얻었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게하시가 보기에 나아만 장군은 자기가 얻은 이득에 대해서 그 어떤 사례도 안하고 그냥 떠나려 하는 것이었다. 게하시는 나아만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스승이 안 받은 그 예물을 자기 것으로 챙겼다. -
여기서 게하시는, 병고침을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단순히 의료 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즉 엘리사는 자기가 소지하고 있는 특별난 기능을 잘 발휘해서 그 기술 덕분으로 문둥병 환자가 나은 것으로 본 것이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정복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냥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혜택을 베푸는 정도로 본 것이다.
게하시는 엘리사와 함께 있으면서도 엘리사가 벌리고 있는 전쟁에 참여할 줄을 몰랐다.
사례물을 몰래 가지고 들어오는 게하시는 곧 긍휼을 입기 이전의 나아만 장군의 모습 그대로였다.
엘리사의 병고침은 사례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사례의 차원을 떠나서 회개할 문제였다.
그런데 게하시는 아직도 사례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이런 게하시에게 문둥병이 덮쳐지고 말았다.
제 2의 나아만이 된 것이다. 게하시는 여기서 무엇을 알아야만 했을까? 단순히 사례비를 받았다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 그는 지금 긍휼 밖의 세계에 놓여 있는 게 문제였다.
긍휼을 입기 전에는 건강한 자이든 문둥병 환자이든 누구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대상임을 알아야 했다.
게하시가 그 문둥병에서 다시 고침 받았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성
경의 관심사는 그의 개인적인 운명이 아니다. 도리어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이다.
이방인이 나아만은 엘리사의 위상을 알았지만 정작 꼭 알아야 될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를 무시했다.
도리어 아람 나라 왕을 더 두려워했다. 즉 여호와에게 굴복할 줄 몰랐던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자체에 대한 심판 행위가 바로 나아만 치료 사건이다.
저주받아야 될 이방 나라 장군에게는 긍휼이 돌아가고 엘리사의 사환에게는 하나님의 저주의 증표인 문둥병이 새로이 덮어 씌어졌다는 말은 현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표적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마 16:4).
즉 '악하고 음란하기에' 주님은 표적을 남겼고 그 표적이 최종 지향하는 바는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서, 전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고자 하는 목적에 있었다. 병 고침 받은 몇 몇을 구원코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포괄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심판하지 않고서는 구원이라 것도 발생되지 않는다.
인간과 싸우시는 하나님 상, 즉 세상에 대해 매일 같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시 7:11) 욥기에서는 욥의 고난으로 표현된 것이다.
무엇이 의이며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의로운 욥의 고난으로 재해석되었어야 했듯이 예수님도 그런 처지에 계셨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5-6).
인간의 참 본질로서 다가오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이라는 조건을 달았던 것이다. 자아를 속이고 자기 자신에게 무지한 소위 스스로 건강한 자는 모조리 주님을 거부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서의 주님이었던 것이다. 이제 요나의 표적, 십자가 중심으로 복음은 전파된다.
과연 이 십자가 앞에서 건강하다고 자랑할 자가 누가 있으며 의롭다고 간주될 자가 누가 있는가.
주님의 질환(십자가) 안으로 같이 환자로서 참여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저주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로서 주님이나 사도들을 통한 병고침은, 곧 건강한 자에 대한 심판 행위인 것이다.
병을 고쳐 주지 않음이 심판이 아니라 병을 고쳐 주는 점이 바로 심판 행위이다.
왜냐하면 병고침은 또 하나의 욥을 세우는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비로 이러한 신적 행위의 절정은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므로서 주님의 병고치심 대열에 가담하는 것이 되고 그로 인하여 성도가 된 자는 새로운 심판의 증거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된다.
이 심판의 흔적으로 인해 세상은 현재 자신이 하나님의 전쟁 선포의 대상임을 폭로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겪는 그 질환, 즉 병은 인간 세계에서 야기된 원인에 의해서 드러난 결과이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 죽음이라는 병은 곧바로 인간 세계가 내뱉은 살인 의지와 관련된 병이다.
인간들의 살인 의지는, 이 세상을 자기 세상으로 만들려는 악마적 특성을 반영해 주는 의지이다.
여기서 인간의 죄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점이다. 인간과 하나님은 싸운다.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살해 의지가 충천한 속에서 구원은 비로소 이루어진다. -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수 10:12-15). -
태양이 중천에 머물고 종일토록 지지 않았던 이유는, 언약대로 구원을 이스라엘에게 주기 위해서이다. 언약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이 약속의 땅에서는 약속민 외에 비약속민은 절대로 살아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권세를 동원해서 그 약속의 이루어내신 것이다. 신약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
이 본문은, 예수님이 산 위에서 기도하신 내용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겨 주신 이들을 필히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유효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 눈에는 모든 것이 우연처럼 간주되겠지만 예수님에게 모든 것이 필연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를 철저하게 색출하여 천국에 절대로 안 넣어 주시기 위해 권세를 사용하고 계시며, 동시에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자는 철저하게 들여 보내기 위해 초월적 권세자로서 그 권세를 적절하게 사용하시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셨다.

이로서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에 와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모두 다 예수님이 하시는 그 전도를 위한 권세에 매여 있다.
오직 예수님만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질서이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 질서 안에서 그의 권세를 마음껏 사용하고 계신다. 인간에게 있어 질병이란 주님이 주신 권세요 지혜이다. 기존의 인간 질서의 실체를 드러내시는 사역이시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 권세의 침범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끊임없이 인간들과 전쟁을 벌리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 지혜와의 싸움이다. 우리는 패배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패배란 그동안 인간 세계를 지배한 악한 권세의 선악체제를 포기한 것을 뜻한다. 선악체제란 모든 것이 힘가진 자 위주로 조성되고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지식과 학문도 많은 힘 가진자들을 옹호하고 그들의 입장을 긍정하고자 등장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힘 있는자, 혹은 살아 있는 자가 아니다. 이미 죽은 자이다.

따라서 자기 중심적 생활을 청산 해야 한다. 이런 자만이 주님의 권세로 인해 죽은 데서 살아난 참된 성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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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나는 아가페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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