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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의표적과 기적이 있는교회

믿음과 사랑의교회     영혼구원하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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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21장3절4절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인 새로운피조물 고백기도

 

나는 영생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사탄을 정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나는 믿음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되었습니다.나는 거룩한자입니다.

나는 모든것을 탁월하게 할수있는 은혜가 있습니다.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며 하나님의 생명과본성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영생은 나의것입니다.의는 나의것입니다.

죄를 죄거함은 나의것입니다.구원 구출 해방 자유는 나의것입니다.

치유와 신성한건강은 나의것입니다.형통은 나의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권세를 가지고있습니다.나는 아가페 사랑을 할수있습니다.

나는 지혜가 있습니다.나는 상황을 바꾸며 항상 승리하는자입니다.

나는 내인생의 선지자입니다.나는 영혼구원자이며 킹덤빌더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사 우리를 영광스런 아버지 나라로 데려가십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개혁)킹덤빌더교회목사 이상열목사 

                                                                                     

                       기독교신앙상담:이상열목사 010-3438-1859 

 
이상열목사후원 :기업은행 010 3438 1859 이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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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해설-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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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킹덤빌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134.114) 작성일16-02-14 15:23 조회3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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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해설

칼 바르트 지음, 이신건 옮김
1. 하늘에 계신...
하늘! 이것은 창조된 세계의 한 부분, 위에 있는 부분, 접근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창조의 한 부분을 말합니다. 하늘에 계신 분은 하늘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이시요, 하늘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경계선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파악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십니다.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능가하십니다.
이런 표현들은 하나의 이념과 추상적인 개념으로부터 끌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표현들은 제한되고 파악될 수 있고 시간에 속한 것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들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려는 시도들이 아닙니다. 이 모든 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비로부터 비로소 그 의미를 얻게 됩니다. 그분의 "초월성"(超越性), "하늘 너머에 계신 그분의 존재"는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칸트의 철학도, 혹은 플라톤의 철학도 하나님의 초월성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파악될 수 없는 것, 우리보다 더 높은 것의 경계선까지만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철학은 하늘 주위로 맴돕니다. 오직 복음만이 하늘에 계신 분, 하늘 너머에 계신 분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 어떤 신령한 자도, 그 어떤 관념주의자(觀念主義者)나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도 우리를 하나님의 현실, 그분의 초월성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초월성은 영(靈)이나 불가시성(不可視性)과 다른 것입니다. 그분의 초월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전능한 자비의 깊음 안에서 입증되고, 드러나고, 실현됩니다.
그분은 하늘에, 그분의 보좌에 계십니다. 하늘과 보좌에 계시다는 것은 그분이 가장 높으신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소원들, 우리의 크고 작은 염려들, 우리의 이상들과 원리들, 우리의 영리함과 어리석음과 대립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본주의(人本主義)와 "동물성"(우리 안의 인간적인 요소와 동물적인 요소)과 대립해 계십니다. 그분은 때때로 우리와 대립하시면서 항상 우리 위에서 우리를 주장하시고 다스리시는 심판자, 왕이십니다. 그분은 항상 동일하신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동일하신 분은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매일 아침마다 언제나 새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매 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영원하십니다. 그분은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며, 은혜 가운데서 자유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자가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친밀하신 인격이십니다. 그분의 섭리 안에서 모든 자들은 그분을 섬길 수 있고, 또 섬겨야 합니다. 예전에도 섬겼고, 앞으로도 섬길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몇 마디 말로 그분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충동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초대와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기도할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이 자유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자유는 단순히 우리의 본성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요, 말씀과 성령의 자유입니다.
2. 우리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초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시고, 우리를 자신의 형제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기도문이 말하는 "우리"라는 말은 아주 특별히 우리를 위해 아버지가 되어 주신 한분의 아버지를 전제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의 사귐, 하나님의 자녀들의 형제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나아가도록,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나님에게 기도하도록, 하나님과 함께, 그분과 하나가 되어 입술과 영혼으로 그분을 찬양하도록 초대하시고, 허락하시고, 명령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이 그분과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과 맺는 사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부르는 이 모임의 사귐 안에서 "우리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하지만 비록 우리는 성도들의 사귐을 나누고 있지만, 아마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사귐을 나누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인류를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 중보 기도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 인류와의 이러한 사귐 안으로 들어갑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대리자(代理者)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많은 사람들, 잃어버린 사람들과 연대관계를 맺으셨던 것과 꼭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분의 말씀과 영을 통하여 우리를 낳으셨고, 옛적에 우리를 창조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창조 안에서, 그리고 창조와 더불어 우리의 삶의 원천이 되시는 분이요,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일시적이고 영원한 우리의 존재 전체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우리에게도 주어질 유업(遺業)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자유로이 나아가듯이, 우리도 그분에게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부를 권리도 없고, 그분의 자녀가 될 권리도 없으며,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권리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분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관계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현실로 나타난 아버지 신분과 자녀 신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우리의 자녀 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자비로우신 우리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집을 떠난 아들이요, 늘 집을 떠나게 될 아들입니다. 집을 떠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 밖에는 그 어떤 권리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버지 신분과 우리의 자녀 신분을 주시는 자요, 그 보증인이십니다. 이 아버지 신분과 자녀 신분이 다른 신분들, 즉 우리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자녀라고 부르는 그 모든 신분보다 비교할 나위 없이 더 높은 이유가 무엇인지 바로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런 인간적인 관계는 다른 관계가 모방하고 흉내낼 수 있을 모범이 아닙니다. 모범, 참된 아버지 신분과 참된 자녀 신분은 하나님이 그분과 우리 사이에서 만드신 이러한 결합 안에 존재합니다.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단지 이러한 본래적인 자녀 신분의 모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미 아버지와 아들의 충만한 현실 안에 있게 되는 셈입니다.
3. 하나님의 일
먼저 주기도문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 기도의 구조가 어떤 의미에서는 십계명의 구조와 일치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처음의 세 가지 기도와 나중의 세 가지 기도 사이에는 매우 분명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처음의 세 가지 기도는 처음의 네 가지 계명과 일치하고, 나중의 세 가지 기도는 다섯째부터 마지막까지의 계명과 일치합니다.
처음의 세 기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주기도는 바로 이것과 함께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즉 그분의 이름,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이 성취되고 완성될 것을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시고 완전히 자족하신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홀로 존재하시길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없이 행동하고 존재하고 살고 염려하고 일하고 싸우며 승리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이 또한 사람의 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무신론자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참으로 존재할까요? 설령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있을지 몰라도,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사람이 없는 하나님은 결코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이를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처음의 세 가지 기도에서 실천하도록 요청된 것, 즉 그분의 일이 성취되는 것을 위해 기도할 것을 허락하시며,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일, 즉 교회와 세계에 대한 그분의 통치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십니다.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된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의도와 활동에 함께 하도록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청이 처음에도 나타나지만, 마지막 찬양에서도 다시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다른 소원의 자유, 기쁨, 용기, 확신은 바로 처음의 이 세 가지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길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 일을 항상 거부하는 사람, 하나님의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죄가 용서되기를 기도할 수도 없으며,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일을 완전히 이해할 때라야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공중에서 똑바로 서 보려고 발버둥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걷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처음의 이 세 가지 기도의 땅을 걷습니다. 수많은 기도가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하나님의 귀에 들리지도 않고 응답받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이 세 가지 기도와 함께 시작해야 하고, 다르게는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모든 것은 간단해집니다.
4. 사람의 일
나중의 세 가지 기도는 직접 그리고 매우 실제적으로 우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복과 안녕, 우리의 육신적, 정신적, 영적 구원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생활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자신의 일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아주 단순하게 우리 자신을 위해 부르짖을 수 있고, 또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우리의 모든 생활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분께 맡기는 것은 단지 하나의 허락이 아니라, 하나의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순례하는 동안에 대단히 많은 짐들을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적인 짐, 물질적인 짐, 세상적인 짐, 영원한 짐, 그리스도교적인 짐, 교회의 짐과 신학적인 짐을 하나님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분 안에서 탁월한 피조물인 사람은 홀로 존재하고 홀로 행동할 수 없는 피조물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람은 먹거나 마실 수도 없으며,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을 방어하거나 구원할 수도 없으며, 슬퍼하거나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희망하거나 절망할 수도 없으며, 성공하거나 실패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은 그분의 덕분입니다. 실로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고정관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은 소리를 지를 수 있으며, 엄마에게 울부짖는 못된 아기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철학 사상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떠난다면,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없다"라는 이 말을 나는 어떻게 확신있게 설명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였다면, 그 즉시 우리는 사람과 그의 본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사람의 운명을 이해한 셈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없기 때문에 - 무신론은 하나의 우스운 발명품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안들과 필요, 우리의 염려와 고통, 우리의 소원, 우리의 모든 것에 참여하십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바로 우리의 삶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우리의 일을 그분의 일과 하나가 되게 하라는 이 명령, 이 초청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라고 초청하시고, 명령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가 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5.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하나다!
사람의 일, 그의 물질적인 필요와 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 다음에 옵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나중의 세 가지 기도가 없었다고 한다면, 처음의 기도도 없었을 것입니다. 전자는 후자와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처음의 기도를 드린 후에 나중의 세 가지 기도를 드리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올바로 기도드리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성품과 마음과 모든 것을 다해 자신의 일과 존재에 몰두하고 있는 처지에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만 존재하진 않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의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국 실제로는 자신의 일을 같이 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의 세 가지 기도를 생략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한 편으로는 교회, 신학, 형이상학의 영역을 갖고, 다른 한편으로는 돈과 가족, 사업, 이웃과 관련된 영역을 갖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이 두 개의 서랍을 갖는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오직 하나의 서랍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두 개의 서랍의 착각만큼 위험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종종 목사의 집 안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두 개의 서랍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여러분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에 하나를 택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일은 서로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두 일을 위하여 동시에 기도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과 함께 기도하자고 우리를 초대하시기 때문이며, 그분 안에서는 이 두 가지 일이 오직 하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서 두 단락 사이의 차이점 못지 않게 그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루터가 그의 소교리문답에서 이 파라독스(矛盾)를 매우 흥미롭고 인상 깊게 강조한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그분의 뜻대로 행동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분의 나라는 다가옵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빌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분에게 뭔가를 채 말하기도 전에 우리의 사정을 이미 아시는 분에게 기도합니다. 참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잊지 마십시다. 루터도 그런 점에서 올바르게 말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기도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세계가 시작될 때부터, 영원부터 영원까지 받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다 갖추어졌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릴 때, 이미 모든 것이 존재해 있습니다.
6.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창조된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히 하나님 자신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대신 나타냅니다.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닐 수 있습니다. 세계 안에는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이름을 새긴 비문(碑文)과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문은 불분명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광고판처럼 계시의 도움을 받아 해독(解讀)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열려 있기 때문에 이 비문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이름은 세계 안에 새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만물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만물은 창조주의 이름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보십시다. 하나님의 이름은 보이는가? 그분의 이름은 드러나는가? 이 비문은 해독되는가? 우리의 눈과 귀는 열려 있는가? 그분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는가?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도하는 자에게 이미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미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다(루터)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 전제야말로 기도의 기초가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아들 안에서 그분은 스스로 말씀이 되셨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도록 육신 안으로, 세상 안으로 오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나타내는 표징(標徵)은 빛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얼굴을 취하셨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분은 친히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살지 않습니다. 그분의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분이 모으셨고 앞으로도 모으실 사람들의 모임,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교회의 활동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이 인류 안에서, 이 역사 안에서 하나의 확실한 사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비밀의 열쇠는 우리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 열쇠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미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있음을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의 교회가 비겁과 소심, 교만과 허풍의 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매일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책상 위에 있는 하나의 진리, 하나의 원리,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살아 계시는 한 인격, 위대한 비밀과 위대한 소박함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한 가운데서, 우리의 삶과 윤리와 습관의 진지함과 명랑함을 통하여 드러날 수 있게 하소서! 매일 당신을 욕되게 하는 우리의 뻔뻔함과 몽매함과 불신앙이 사라지고 억제되게 하소서! 다시금 우리 손 안에 놓여 있는 이 열쇠를 조금이라도 돌려서 아름다운 그 날에 문을 열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7.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성서에서 창조주의 의도와 일치하는 세계의 삶과 목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에 대한 마지막 승리를 말합니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 하나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존재합니다. 하늘과 땅이 새로운 것은 세계가 하나님의 평화로 진입하였기 때문이요, 이 평화가 세계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승리하시는 주님, 창조주의 정의를 말합니다. 세계의 마지막과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소서!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가능성을 무한히 넘어서는 성취를 늘 새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해방, 그러한 승리, 그러한 화해와 갱신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능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다가 옵니다. 이 나라가 오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기도 제목일 따름이며, 오로지 그분의 활동의 결과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한다면, 이것은 이렇게 기도하는 자가 이 나라, 이 삶, 이 정의, 이 새로움, 이 화해를 알고 있고, 이 모든 것이 그에게 낯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는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곳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우리가 기다리는 사건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성컴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있고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에 일어나기 시작한 하나님의 위대한 운동이 인간을 위하여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미래는 분명히 과거의 흔적을 가지게 될 것이고, 우리의 과거는 분명히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며, 이미 오신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제 만물 위에 드리운 이 보자기가 밥상 위에 드리운 보자기처럼 벗겨지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밥상은 이 보자기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를 보려면, 이 보자기를 벗기내기만 하면 됩니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덮고 있는 이 보자기가 벗겨져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변화된 만물의 현실을 볼 수 있기를 우리는 지금도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개인 생활, 우리 가족, 교회 생활, 정치적 사건들, 이 모든 것들은 보자기입니다. 현실은 그 아래 있다. 우리는 아직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치 거울을 보듯이 희미한 반사체를 봅니다. 우리가 현실을 볼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알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신앙 가운데서 유랑할 뿐, 아직까지는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미 성취된 이 새 시대, 이 승리의 첫 발자취만이라도 벌써 여기서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만물을 포용하는 아침의 빛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우리 역사의 사건들을 우리에게 가까이 온 그 나라의 관점 아래서 볼 수 있게 하소서! 우리 시대, 오늘과 내일을 위한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대한큰 종말과 함께 오는 위대한 미래는 작은 종말과 함께 오는 미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투는 많은 싸움들, 특히 근본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우리의 개인적, 심리적인 갈등들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입니까? 우리는 오로지 부활절이 세계를 위한 보편적인 사건이 될 날을 기대할 따름립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될 것이 때문입니다.
8.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고 창조주와 주님으로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또 이와 동시에 그분의 피조물을 의롭고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그분의 계획을 실현하십니다. 그분과 비교할 때, 피조물은 너무나 작고 미약하며 위협받는 존재요, 너무나 실수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에 쫓기고, 길을 잃었으며,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피조물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며, 그분의 나라을 드러냄으로써 그분의 일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은 바로 이러한 계획이 실현되길 바라시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태초와 마지막 사이에 지금 이 계획이 이루어지길 바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계획을 이루는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계획과 실행은 그분께 속한 것이요, 시간도 그분께 속한 것이요, 지금 존재하는 것과 장차 존재할 것, 시간의 모든 내용은 그분께 속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 번씩 기도의 대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피곤치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분이 참는 것을 그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종말까지 계속 통치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실행하시고 성취하시는 중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가운데서 기도드리는 자요, 따라서 그분의 뜻이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하늘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의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이루어졌고, 이루어질 것이며, 시간 안에서 전개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분 가까이에서 일어났고 또 일어나는 일의 신비 가운데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태초의 창조 안에서, 그분의 세계 통치 안에서, 모든 사건들의 의미를 충실히 표현하는 그분의 계약의 역사 안에서 그분의 뜻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뜻을 알고 계십니다. 이 뜻은 "당신의 우편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뜻을 믿을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이 뜻은 이미 이루어졌고, 하늘에서 중단 없이 이루어집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실로 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뜻이 우리에게 친숙한 생활 속에서, 우리의 세계 안에서 성취되길, 우리의 눈에 명백히 보이길 기도합니다. 땅에서 그분의 뜻이 성취되는 형태가 하늘에서 성취되는 형태와 같게 되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의 세계사와 교회사 안에 있는 밝음과 어둠, 거룩함과 어리석음, 지혜와 습관의 혼합은 우리의 생활을 너무나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혼돈이 완전히 밝히 드러나길 기도합니다. 하늘에서는 이것이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가? 우리는 복음을 거역하는 일, 늘 반복하여 복음을 위조하는 일, 복음을 일종의 새로운 율법으로 만드는 일을 중단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때, 우리의 불순종의 이런 끝없는 불완전함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길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소서! 그리고 우리가 처한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언젠가 벗어나게 하소서!
9. 나중의 세 가지 기도
이 세 가지 기도에서 이제 기도는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명령(命令)의 형태가 됩니다. 앞에서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제는 다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시고,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의 대담성에 주목하십시오. 차라리 나는 이 기도가 저돌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일, 인간의 일에 관여해 달라고 하나님께 감히 졸라대는 인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명령 형태의 말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읍니까는? 대답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처음의 세 가지 기도에서 하나님의 일, 그분의 이름의 거룩함, 그분의 나라의 도래와 그분의 뜻의 실현에 관여하도록 허락받은, 아니 그렇게 하라고 명령까지 받은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대관절 우리의 관심사이란 말입니까? 분명히 그러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관여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同役者), 협력자(協力者)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일을 우리의 일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다음에 오는 이 세 가지 기도문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는 처음의 세 가지 기도의 결과로서 자연스러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 당신께서 우리를 보시는 그대로, 우리의 모습 이대로, 아마도 당신께서 만나길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의 일에 이미 관여한 우리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되기를 갈망하는 소원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밖에 다른 임무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염려입니다. 우리를 스스로 돕는 것은 우리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관심은 오직 불충성, 무율법, 불순종일 따름입니다. 기도하도록, 그리고 당신의 일을 위하여 살도록 초청하시고 명령하신 당신에게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맡깁니다. 여기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우리가 인간의 일로써 당신의 일에 관여하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로부터 이 세 가지 기도의 용감한 호소가 나옵니다. 이 기도는 이러한 운동을 나타냅니다. 외적으로, 내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섬기라는 그분의 명령 앞에 다가섭니다.
처음의 세 가지 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그분의 투쟁에 참여하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은 세상을 이기신 그분의 승리, 이 기도에서 표현되는 탄식의 실현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기신 그분의 승리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셨고, 이제 우리가 그분의 승리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십니다. "오, 당신의 이름이... 당신의 나라가... 당신의 뜻이..."라는 탄식기도를 감히 드리는 자유를 갖기 위하여 우리는 자신의 승리에 참여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을 활용합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어째서 내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시고..."라는 기도가 대담하고 저돌적인 기도라고 말했는지를 설명하는 정당하고 좋은 이유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감히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 곁으로 다가갑니다. 우리는 이 기도가 놀라운 것임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는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과 자매들의 섬김의 의무로부터 생기는 위대한 자유 안에서만 드려질 수 있습니다.
10.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잘 알다시피, 루터는 그의 소교리문답에서 "일용할 양식"이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음식, 음료, 의복, 신발, 집, 마당, 농장, 가축, 돈, 물건, 경건한 아내, 경건한 자녀, 경건한 친구, 경건하고 신실한 상전, 좋은 정부, 좋은 (너무 덥거나 춥지 않은) 날씨, 건강, 결혼, 좋은 친구, 신실한 이웃. 이것들은 적지 않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 목록에서 16세기 독일의 소시민적 농가의 필수품과 생존 조건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목록을 우리 시대와 우리의 특별한 상황의 필요에 맞게 해석하고 보충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이런 넓은 의미로 생각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원래의 단어가 갖는 완전한 순수성을 잊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서의 언어에서 일용할 양식은 두 가지 해석을 갖습니다.
1. "일용할 양식"은 살아가는 데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것, 가난한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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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나는 모든일에 승리하는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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