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킹덤빌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134.114) 작성일16-02-14 13:23 조회289회 댓글0건본문
종교개혁사
목 차
석사 시험을 치르고 나서, 그는 법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인문과학부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루터에게는 그의 생애에서 중대한 국면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1505년 여름에 천둥과 폭우 속에서 St.Anne에게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부터 2년이 지난 다음, 그는 사제에 임명되었으며, 계속해서 수도원의 연구과정에 따라 신학을 공부했다. 일년 동안 비텐베르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대한 강의를 마친 1509년에, 그는 이른바 [조직신학의 교사]가 되어, 피터 폼바르드의 조직신학에 관한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1510년,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 안에서의 논쟁과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다가, 당시 로마를 순례하고 온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 처럼 그곳의 타락상을 보고 충격을 받지만 신앙은 흔들리지 않은채, 에르푸르트로 돌아와 얼마동안 있다가 1511년 비테베르크로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계속해서 슈타우피츠의 후원과 지도로 학문연구와 설교에 헌신하게 되는데, 그 다음해인 1512년에 그는 신학 박사의 학위취득과 함께, 대학에서 성경학을 강의하는 정식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강의를 통해서 시편(1513-1515), 로마서(1515-1516), 갈라디아서(1516-1517), 히브리서(1517-1518), 그리고 다시 시편을 주석했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간
결국 자신의 구원을 의심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페험하지 않는 한, 버림받은 자가 아닌지를 스스로 물어야 했다.
여러가지 치료를 시도했다. 어거스틴, 베르나르, 제르송 등은 그에게 "비교적 위안"을 주었다. 슈타우피츠도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그의 비극적인 죄의 개념과 하나님에 대한 지고한 개념에 상응하는 해결책이 필요했다. 루터는 오랜 과정을 거쳐 그 해결책을 찾아야 했고 그것은 결국 로마서 1장 17절에서 나타났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죄에 매여 있는 인간을 그의 사랑으로 감싸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총안에 수납된 신자는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이다. 그가 의인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를 전가하시길 거부하시고 믿음을 통해 그를 의의 자리에 두시기 때문이다. 그가 죄인인 것은 악을 원함이 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개혁적인 발견의 시기를 대답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 1518년 봄, 혹은 여름으로 많은 연구가들은 본다. 그는 루터의 발견이 "말씀의 신학"의 발견이라고 여긴다. 베텐베르크의 수도사가 로마서 1:17을 통해 배운 것은 "의가 복음안에 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이 "복음 안에서"라는 말이 그때까지 풀리지 않다가 그 의미를 갖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어쨌든 많은
그는 면죄부 문제가 양무리들에게 야기한 끔찍한 결과들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피상적 경건을 조장했고, 기독교인들을 구원의 참된 근원에서 멀어지게 했다.
교회는 면죄부라는 수단을 통해서 죄인을 징벌과 허물에서부터 건져낸다고 주장을 했다. 그 결과 단순한 사람들에게 교황청의 면죄부는 완전 용서와 동의어가 되었다. 혼동은 심각했다. 식스투스4세 교황(1476)이후 면죄부가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서도 팔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면죄부에 대한 첫 설교를 한지 일년 후, 루터는 만성절에 이 문제를 다시 취급했다. 당시에 레오 10세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증축을 위해 면죄부 판매령을 1515년에 재가하고 면죄부의 판촉 설교가 독일 북부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터는 신학자들을 일깨워 이 문제를 숙고하게 할 필요를 느끼고,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 효능"을 묻는 95개 조항을 작성한 것이다.
루터는 95개 명제에서 다만 교회가 이제까지 가르쳐 왔던 것을 상기해보자는 제안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와는 어긋나게 로마의 재정을 위해 신앙을 이용 착취했던 방법에 분개했던 모든 이들에게 이 95개 명제들은 일종의 해방 선언문과도 같이 등장했다.
이내 종교재판의 책임을 부여 받고 있던 마인즈의 대주교와 도미니크 파는 루터를 로마에 고발했으며, 독일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1518년 초 테첼이 반박하였고 엑크가 비난했다. 이에 루터도 응수했다.
한편 레오10세는 어거스틴 수도회의 임시 총회장이었던 가브리엘 델라 볼타에게 임무를 부여하여 슈타우피츠로 하여금 그 밑에 있는 부하를 회개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이 진리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철회를 거부했다. 이렇게 해서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하이델베르크 참사회는 95개 명제가 터뜨린 논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교황청 재무국에서 행한 조사에서 루터는 1518년 7월 초 두달 안으로 로마에 출두하라는 소환을 받는다.
이 논쟁이 1519년 7월 라이프치히에서 열렸다. 가장 큰 쟁점은 루터가 13번째 논제에서 문제시한 교황의 최고권이었다. 루터는 교회란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이시기 때문에 지상의 우두머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 교회는 교황제의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반석 위에 서 있다고 주장했다.
곧 그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합법적 권위인 성경의 권위밖엔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
교황청은 루터에 대한 조사를 재개했다. 이 조사가 진행되는 중 루터는 [로마교황제에 대하여]라는 소논문을 내놓았고, 한방 먹은 교황청은 1520년 6월 15일 엑수르게 도미네라는 교서를 공포했는데 이 교서에 따르
이 소식을 들은 루터는 폭 넓은 논쟁을 벌릴 결심을 했다. 인문주의에 가담한 수많은 인사들은 루터가 로마의 독재로부터 독일을 건지는 데 앞장서기를 바랐다. 루터는 1520년 8월, 이들에게 [기독교 국가 치료에 대한 독일 기독교 귀족에의 호소]문을 보냈다.
이어서 그는 특별히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1520년 10월에 간행된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썼다. 여기에서 그는 교회가 그 자유를 상실했고 성례들을 사제들의 손에서 노예화의 수단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성례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루터는 엑수르게 도미네 교서를 읽고 분노 섞인 고통을 느꼈으며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동기의 진지함을 로마에 증명해 보이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써서 1520년 10월에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인은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인 그는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또한 기독교인은 매사에 있어서 종들 가운데 가장 잘 섬길 줄 아는 자이다. 그는 모든 이에게 종속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에게 가해진 위협을 없애지 못했다.
칼5세와 협력하여 로마는 루터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터는 오히려 공의회의 소집을 다시 요청하고 엑수르게 도미네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살랐다. 로마는 1521년 1월 3일, 새 교서를 내려 루터와 그 일당의 파문을 선포했다. 결별은 이뤄졌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절반이 출애굽"하는 결과를 야기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새 황제 칼5세가 주재한 보름스 국회에 루터가 불려 갔을 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세속당국은 민중봉기가 두려워 로마의 종교재판에 넘기기를 거부하고, 그에게 다시 한 번 철회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험의 경고를 듣고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하여 갔다.
1521년 4월 17,18일 양일에 루터는 국회 앞에 소환되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성경의 증거에 의해 자신의 오류라고 확신케 되지 않는 한, 자신의 작품들을 철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칼5세는 분노하였다. 하지만 군주들에 의해 본의 아니게 루터를 굴복시킬 목적에서 계속적인 대화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루터는 4월 26일 황제가 발급해준 통행증을 휴대하여 보름스를 떠났다.
현자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닥친 위험을 이미 예상했다. 그는 도중에 루터를 빼돌려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다. 이곳에서 루터는 10개월간의 은둔기간 중에 그는 [시편 연구]를 계속했고, [성모 마리아 송가 주석]을 완성했다. 또한 [교회 설교집]을 작성하는 한편, [신앙고백에 대하여]를 써서 의무적 고백을 반대하고 자발적인 고백을 권장했다. 그리고 비텐베르크의 자기 제자들의 관심사에 대답하는 [수도원 서약에 대하여]와 [개인 미사의 폐지에 대하여]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번역에 전념하였다.
한편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개혁운동의 흐름이 젊고 수줍은 멜란히톤의 태도에서 벗어나 급진적인 칼슈타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1521년 10월, 빵과 포도주 두가지로 성찬을 거행했다. 그리고 성탄일에는 독일어로 미사를 드렸다. 1522년 1
결국 2월에 그는 기독교 백성이 스스로 통치할 권리가 있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계시를 받았다는 두 명의 방적공들의 영향을 받아 조명주의 경향을 기울었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의 권위보다 성령의 내적 운동들을 더 좋아하게 하였다.
루터는 자신이 시작해 놓은 이 운동의 전개를 불안하게 보다가 은신처를 떠나 비텐베르크의 의회와 대학 호소에 응하러 갔다. 그 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칼슈타트가 너무 빨리 해놓은 혁신들이 다시 거부되었다.
문제들이 어느정도 해결되자, 루터는 로마의 신학자들에 맞서서, 그리고 예언자들에 맞서 새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여기 저기 다니며 설교를 하였다. 또한 밀도있는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교회 사역을 세움에 대하여]와 [기독교 회중이 교리 문제를 판단하고, 설교자들을 청빙, 위임, 면직할 권리와 권세를 가짐에 대하여]라는 논문들을 출판하였다.
2년 후, 루터는 농민들이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지지해달라는 요구를 또 다시 거부했고 이 결과는 심각했다. 반란이 지나가는 곳은 어디나 폐허가 되었다. 군주들의 진압도 또한 끔찍했다.
농민들의 개혁안에 의견을 제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루터는 [슈바벤 농민의 12조항에 대한 평화의 촉구]라는 글을 써서 대답하면서 그는 기독교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연결시키기를 거부했다. 이런 태도는 자기들의 사회적 조건의 변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을 깊이 실망시켰다.
루터는 목숨을 걸고 튀링겐의 반도들과 접촉을 시도한 뒤, [범죄적이고 약탈적인 농민집단을 반대함]이라는 맹렬한 비방문을 작성하였다. 이 비방문은 시골 주민들 가운데 그를 지지했던 수많은 민중들을 잃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에 그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주들 편에서 그에 대한 신망이 커져갔다.
농민 봉기 그에게 가져온 염려에서 해방되자, 루터는 환속한 수녀 카드린 폰 보라와 결혼한 후, 1525년 말, 에라스무스 쪽을 향하여 그와 그의 찬미자들 모두를 거부한다고 통고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카톨릭의 압력에 의해 1524년 [자유의지를 혹평함에 대하여]라는 글을 출간하여 루터를 공박했다. 이에 루터는 [노예 의지론]에서 응전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만]과 [오직 은혜로만]의 교리를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죄의 심각성을 들춰냈다.
이처럼 1522년에
그는 이 세번에 걸친 거부를 통해 기사들의 민족주의, 농민들의 "사회중의" 그리고 기독교 인문주의와 결별을 한 것이다.
1526년에 이 데쏘 동맹에 토르고 또는 고타 동맹이 맞섰다. 토르고 동맹의 회원들은 복음주의 신앙을 수호하는데 심려를 아끼지 않았지만, 또한 그들은 그때까지 불규칙적이었던 복음 신앙 전파에 질서를 세워야 할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조직을 위한 노력을 루터는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군주들의 보호하에서 복음주의 교회들의 창설 문제에 망설이며 신중을 기하긴 했지만 결국 농민 폭동 때 교훈을 받아 자기의 힘있는 보호자들의 간청에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복음 메시지의 설교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세속 당국에 의뢰했던 이 결정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1525년 이전에는 자체의 힘으로 전개되던 "자생적 민중 운동"이었던 종교개혁이 농민 전쟁을 치루면서부터 군주들의 일거리가 되었고, 남부와 서남부에서는 도시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복음주의 교회 조직의 첫 시도는 1526년 10월 홈베르크 대회 이후, 수도사였던 아비뇽의 랑베르의 도움으로 필립 폰 헤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조직은 루터가 시기 상조요 신중치 못한 것으로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에, 헤세 지방에선 적용되지 못했다. 종교개혁에 가담한 군주들은 새로운 교회법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루터의 제안을 고려했다. 다시말해 그들은 그들 국가들에서 복음의 이상이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 감찰에 의지한 것이다. 첫 감찰이 실시되자 많은 교회 성직자들의 영적 비참함이 드러났고, 따라서 그들의 양무리들의 종교적 비탄이 들춰졌다. 멜란히톤은 그들을 위해 교육서들을 작성했고 루터도 이들을 염두에 두고 1529년 [대 소 교리문답]을 작성했다.
1526년 프랑소아 1세는 칼 5세와 싸우기 위해서 교황 클레멘트 7세와 제휴했다. 그러자 황제는 토르고 동맹
이렇게 일시적 휴전이 체결됨으로 개신교 군주들은 "새" 복음 확산에 상당히 봉사를 했으나 이 휴전은 1529년 4월 슈파이어 2차 국회시, 매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칼 5세는 보름스 칙령의 적용 뿐만 아니라, 차기 공의회까지 종교개혁의 확장을 중지할 것과 복음에 가담한 영토내의 카톨릭 예배 허용을 요구하였다. 국회의 참여자들은 대다수가 카톨릭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황제의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 소수의 복음주의자들은 3년 전 슈파이어 국회에서 부여받은 자유를 위반하는 이 결정에 대해 항의했다(이 항의라는 말에서 종교개혁의 가담한 이들에게 <프로테스탄트>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 개신교 소수 가운데 군주들과 독일 고지대의 대표들이 있었지만 황제와 카톨릭 국가들의 세력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필립 폰 헤세의 선동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은 비텐베르크와 독일 고지대 사이에 존재하는 교리적 차이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는 츠빙글리 및 스위스 프로테스탄트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 계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년 전부터 성찬에 대한 견해로 츠빙글리와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립 폰 헤세가 교리적 상호이해를 통해 카톨릭 세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개신교 동맹을 준비하려는 열망에서 1529년에 독일과 스위스 신학자들을 마르부르크에 소집하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양측은 논쟁 대결을 벌렸다. 그러나 3일간의 힘든 대화 끝에, 두 파는 서로 용납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헤어졌다.
마르부르크 회담의 실패는 필립 폰 헤세의 계획을 돕지 못했다. 오히려 더 상황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칼 5세는 1530년 여름 내내 아우그르부르크에 국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스위스인들은 국회
이처럼 평화적이고 능숙한 기교를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국회에 참석했던 가톨릭 국가들의 대표자들의 눈에 호의롭게 보이지 못했다. 그들은 엑크를 시켜 멜란히톤에게 응전을 하여 [카톨릭 논박]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을 칼 5세가 수정하여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옹호했고 칼 5세는 거부함으로 끝났다. 황제는 1530년 11월 19일 국회를 끝내면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1531년 4월 15일 이전에 로마에 굴복하라고 경고했다.
위험에 직면한 복음주의 군주들과 종교개혁에 가담한 독일 고지대 도시들은 필립 폰 헤센과 작센의 요한의 지휘하에 서로의 동맹을 꾀화여 1531년에 슈말칼덴 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황제는 개신교와 타협하여 1532년 7월 23일에 누렘베르크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종교개혁이 전진을 계속하는 동안 조명주의가 다시 이번엔 화란과 독일 저지대에 모습을 보였다. 멜키오르 호프만이라는 수아브 모피상인이 앞장섰는데, 사람들은 자주 재세례파라는 칭호를 주었다. 호프만은 자신이 받았다는 계시에 항상 빠져 복음의 가르침에서 멀어졌다. 그는 세상의 종말을 1533년으로 예언하고 스트라스부르가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스트라스부르 당국에 의해 종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멜기오르파는 호프만이 투옥되자, 요한 마티스를 새 영적 지도자로 삼아 뮌스터가 예언들이 실현될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몰려 들었고 이들은 지배 계급에 불만을 품고 있던 직공들의 협력으로 권력을 탈취했다. 그러나 뮌스터의 주교가 도시를 공격했을 때, 열광적으로 저항했다. 1534년 부활절에 마티스가 탈출하다 살해당하였고, 1535년 6월 24일 밤중에 한 배신자가 도시의 문을 포위군에게 열어주어 주교와 군주의 연합군이 들어와 조명파들의 "공산주의 신정정치"를 종식시켰다.
뮌스터의 참변은 카톨릭이 보기에 비테베르크 운동의 결과들 가운데 하나로 보였으며, 또한 로마에 충실한 제국가들에게 "새" 신앙에 대한 적대감을 야기시키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들과 뮌스터의 예언자들과는 전혀 공통된 점이 없음을 지적하였고, 루터는 1536년에 [세속 당국이 재세례파들을 육체적 형벌로 맞서야 할 의무]라는 논문을 쓰고, 칼뱅도 [왕께 드리는 서한]을 작성하여 프랑소아 1세에게 복음의 가담자들이 폭도도 혁신자들도 아님을 보이려 했다.
스트라스부쳐의 개혁자인 마틴 부쳐의 성찬의 문제를 위한 수고는 비텐베르크 협약으로까지 나아갔고, 루터주의의 영향력을 독일 고지대에 더욱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1539년 종교개혁에 가담한 두개의 또
그런데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로마는 무슨 일을 했는가? 사실 로마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갈망에 진정으로 응답해 주거나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폴 3세는 1537년 만토바에 공의회를 소집함으로서 보다 호의롭게 보였지만 개신교 제국가들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로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개신교 제국가들이 슈말칼덴에서 보여준 강경태도는 가톨릭 제국가들로 하여금 1538년 "방어동맹"인 누렘베르크 동맹을 결성케 했다. 그러나 황제는 1539년 프랑크푸르트 휴전 조약 체결을 하여 신학적 대화를 통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을 장려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540년과 1541년 사이에 아그노, 보름스, 라티스본 회담들이 열렸다. 그러나 어떤 일치된 협약에 도달하지 못한채 회담들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인해 독일은 두파로 계속 분열되어 긴장된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540년 개신교의 참피온인 필립 폰 헤세가 중혼을 함으로서 이 균형은 깨어지고 만다. 그는 황제 앞에서 1541년 6월 13일 슈말칼덴 동맹에 더이상 새 회원을 받지 않고, 또 외국 세력과 협정을 체결치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속죄하였다. 1543년 칼 5세는 영토을 확장을 하였고, 이때 프로테스탄트 제 국가들이 보여준 머뭇거림은 결과적으로 라인강 유역 지방에 종교 개혁을 확립시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칼 5세는 여기에 만족치 못하고 개신교파를 분열시키고 종교개혁에 가담한 국가들을 끝내기 위하여 교황 폴 3세로부터 트렌트에서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약속 받아 1545년 3월 15일로 개회 날자를 정하고 소집을 하였다.
개신교의 참여를 바라지 않는 황제의 계산대로 개신교도들은 트렌트 회의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였다. 이에 칼 5세는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을 터뜨려 슈말칼덴 동맹에 가담한 국가들을 처벌하고자 하였다. 전투는 결국
그러나 모리츠 폰 작센이 황제에게 패해 무력해진 개신교 군주들의 선두에 선 독일 개신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아우그스부르크를 점령하고 칼 5세를 인스브룩크에서 쳐부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이 승리로 인해 독일 개신교는 파사우 조약(1553년)을 통해 개신교들에게 다음 국회소집 때까지 관용을 베풀겠다는 약정을 얻어냈다. 다음 국회는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일어났고, 이 국회는 종교개혁에 대해 그동안 계속해온 투쟁들을 끝맺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새로운 세력에 의해서 위협을 받았는데 그것은 칼빈주의와 반동 종교개혁이었다. 이 두 세력의 등장으로 독일 내부에서 고유의미에서의 종교개혁 시기는 끝을 맺는다.
제 3 장 츠빙글리 및 부쳐의 종교개혁
이곳에서 그는 공부를 계속하였고, 1513년부터는 공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노바라 전투와 마리그나노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소아 1세에게 스위스 군대가 패배한 뒤, 용병제도를 반대하고 중립을 권장했는데 이것이 교구신도들과의 마찰을 일으키게 되어 그는 글라루스를 보좌신부에게 맡기고 떠나 1516년 아인지델른에 설교자가 되었다.
많은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한 츠빙글리의 설교는 이내 아인지델른 밖에까지 명성을 높에게 했다. 그리하여 1518년 말 그는 추리히의 "성직자 교회의 설교자 겸 신부"로 임명되었고 1519년 1월 1일부터 그 직분을 수행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적 의미에서 개혁 작업을 끌고 갈 결심을 하고, "연속 강해"원칙에 따라 강해설교를 견지했다. 또한 문학써클을 형성하여 신학과 헬라어를 연마했다.
그러나 얼마있지 않아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 형태의 쇄신에서 결연한 개혁적 태도로 나아갔다. 1519년 페스트가 창궐했던 츄리히에 그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이 전염병에 걸리고 나서 인간의 연약성과 은총의 전능성을 느꼈다. 그리고 1521년 그가 글라루스의 신부로 있던 시절부터 로마에게서 받아오던 연금을 거절했다. 이렇게 그는 개인적 탐구 끝에 에라스무스적 "기독교의 재생"에 회의를 품고 개혁자가 되었다. 비
이러한 인문주의에서 개혁자 진영으로 츠빙글리를 인도한 발전의 열매들은 1522년 맹백히 나타났다. 그해 초, 그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쏘세지를 먹은 인쇄업자 프로샤우어를 변호하여 금식과 관련된 교회법의 불법적 성격을 확신하였다. 또한 교회의 독신제도가 성경적 기초를 갖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1522년에 애국자의 과부와 결혼하고 콘스탄스 주교에게 결혼 자유권을 요구했다. 결국 그해 여름에 아폴로게티쿠스 아르케텔레스를 출판하여 여기에서 오직 유일한 권위인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겠다고 선포했다.
츠빙글리의 설교와 행동이 야기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츄리히 당국은 신학 논쟁을 위하여 각 도시의 사제들과 대표자들을 소환했다. 이 논쟁에 대비하여 츠빙글리는 67개 논제를 작성하였고, 이 교리는 신앙은 말씀의 중재없이 성령의 직접적 주입으로 인간에게 생겨난다고 가르친 일종의 영성주의적 색체를 가진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성격을 띄었다. 츄리히의 첫 신학 논쟁이 1523년 1월 29일 열려서 신속한 토론을 거친 후, 당국은 67개 조항에서 나온 개혁안을 채택했다.
논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독일어로 출판된 최초의 복음주의 교의학 논문인 [67개 논제 해설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라는 설교에서 사회문제를 비판했다. 예배의식의 개혁에도 전념하여 예배에서 라틴어를 없애 버리고, 성찬에 모든 제사적 성격을 부인했다. 이렇게 하면서도 개혁의 기초를 놓되 이것이 위정자의 보호하에 질서있게 시행되어야 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이러한 의도는 몇몇 성상파괴자들이 1523년 9월 성전에 성화들과 성상들을 파괴함으로 말미암아 실패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국은 1523년 10월 제2차 츄리히 논쟁을 소집했다. 이 회담에서 우선 신자들 마음에 팽배해 있는 우상숭
츠빙글리만이 교회 갱신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츄리히 사람으로 츠빙글리를 지지한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하나인 그로스만과알자스인 레오 주트, 그리고 루체른 사람인 오스발트 미코니우스 등이 있었다. 이런 인물들이 팀을 이루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은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24년 수도원들이 세속화되었고 그들의 재산이 빈민구제를 위해 분배되었다. 같은 해, 츠빙글리의 선동으로 교회 참사회의 재산과 수익금들이 1525년에 문을 연 성경주해학교 창설을 위해 쓰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주도적 행동이 물론 중대했긴 했어도 츄리히를 온전히 개혁된 도시로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1525년에야 미사를 페지하였고, 대신 극도로 간소화된 예배의식으로 대체되었고 미사와 전혀 다른 성찬은 일년에 4번만 거행하도록 되었다.
종교개혁이 이처럼 츄리히에 심어져 혼인 재판소 설립으로 미풍양속에까지 확산되는 동안, 그리고 츠빙글리가 [참종교와 거짓 종교의 해설]을 1525년 출판하여 프랑소아 1세에게 헌정하는 동안, "새"신앙에 가담한 이들 가운데 반대세력이 생겨났다.
재세례파로 알려진 참을성이 없고 급진적인 기독교인들은 콘라드 그레벨과 펠릭스 만츠였다. 이들은 1523년부터 츠빙글리가 교회 개혁들을 세속권의 결정에 연결시켰다고 비난하면서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위정자의 권위를 문제삼고, 모든 선서를 거부하며, 군대의 힘에 의뢰하는 것도 거부하고, 자기들의 목사들을 스스로 임명할 권리를 요구하며, 유아세례를 거절하면서, 그들은 성도의 교제를 보이는 방법으로 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츠빙글리는 그를 반대하는 자들을 설득시키려고 펜을 들고 혹은 특별대담과 세 번의 공개 토론을 가졌지만 그들이 "오류들"에서
이런 "이단"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가톨릭 주들은 1524년에 베켄리이드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에 위험을 느낀 츠빙글리는 [경건한 연방주들에게 보내는 신실하고 진지한 권면]을 통하여 스위스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말것을 권면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공동관할 구역들에서는 양 신앙고백의 참여자들 사이에 긴장이 커져갔다. 가톨릭 주들은 종교개혁을 "뿌리채 뽑고, 금지하고 처벌하고 제거하기로" 결심하고는, 1526년 종교문제를 끝내도록 결정했던 국회를 대비하여 바덴에서의 회담을 소집하였다.
1526년 5월 21일에 열린 이 회담에 로마 교회는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대표단을 파송했다. 이에 종교개혁 측에서는 변호를 위해 바젤의 외콜 람파디우스와 베른의 할러를 보냈다. 엑크는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찬론 견해를 대립시키는 능숙함을 보였고, 결국 개신교 진영에 불화의 씨를 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 바덴 논쟁은 가톨릭의 승리로 끝났다. 츠빙글리는 파문되었고, 국회는 츄리히로 하여금 츠빙글리를 포기하되 그렇지 않으면 연방에서 제외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츄리히는 츠빙글리 편에 있었고, 또한 베른과 바젤, 및 샤프하우젠 등이 반대했다.
바덴 논쟁이 있은 다음, 츄리히만이 복음적 교리에 전적으로 가담했다. 바젤과 베른에서는 "새"신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정치적 사건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1527년 한 해 동안에 여러번의 선거에서 종교개혁의 가담자들이 베른 시 대의회의 다수를 점령한 것이다. 시의 대의회는 종교 문제에
이렇게 해서 1528년 1월 베른 논쟁이 열렸고, 로마 교회는 2류급 인사들을 파견했다. 반대로 종교개혁측은 일단의 탁워란 신학자들이 대변했다. 토론은 복음주의 교리의 옹호자들이 승리함으로서 끝났고, 그 결과 베른에서는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이로인해 종교개혁이 쥬네브에 발을 붙일 수 있었고 프랑스 개신교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베른 논쟁 이후, 1524년 베켄리이드 동맹을 체결한 바 있는 가톨릭 주들에 응전하기 위해 조직을 강화했다. 그러자 가톨릭 주들은 국가적으로 스위스인들의 원수인 오스트리아와 결탁하면서까지 반발하였다. 전쟁의 선전포고까지 다다른 때에, 글라루스의 책임자가 화해를 성공시킴으로 인해 양측은 화해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카펠 평화 조약에 뒤따르는 몇달을 이용하여 츠빙글리는 1529년 10월 마르부르크에 가서 성찬문제로 루터와 토론했고, 1530년 부쳐의 주도하에 막 [4도시 신앙고백]문서를 작성한 독일 고지대 도시들의 신학자들과 대화를 개시했다. 1531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요점]을 프랑소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츠빙글리의 노력은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츄리히에서 그는 "교회적 구속력" 문제로 시의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시의회는 사임을 거부하였다. 1531년 10월, 가톨릭 주들은 츄리히를 공격하여 카펠에 모인 츄리히 군대를 패주시켰다. 츄리히의 원정군에 속했던 츠빙글리는 전투 도중 살해되고 말았다.
이 참패 이후, 개신교 주들은 패배를 만회할 방법을 도모하지 않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인해 비록 츄리히에서는 새 신앙의 독립과 그 예배를 보장해주었으나, 그 조약은 종교개혁의 확장을 분명 중지시키고 말았다.
츠빙글리의 죽음 이후, 알자스 사람 레오 쥬드와 브렘가르텐 출신의 젊은 성
그는 특히 영국 성공회에 대해 조언자의 역할을 해주었다. 나아가 종교 개혁의 교회들에게 그들의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하나인 제2스위스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는데, 이 문서는 1566년 팔츠 선거 후에 의회 신앙고백으로 채택된 뒤, 같은 해 쥬네브 교회와 대부분 스위스 개혁파 교회들에 의해 인정되었다. 또한 프랑스에서도 수용되었고, 스코틀랜드, 헝가리, 폴란드, 오스트리아에서도 채택되었다.
이렇게 투쟁에 뛰어들면서 젤은 카피토와 특히 마틴 부쳐라는 동역자를 얻게 된다. 카피토와 반대로 1523년 당시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부쳐는 하이델베르크 논쟁 당시(1518년), 루터에게 사로잡혀 수도원 서약을 스스로 풀어 버렸다. 그리고 결혼하여 슈파이어 주교가 자신을 쫓아냈던 비셈부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설교했다.
젤의 제안으로 부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위해 성경을 강의했다. 그리고는 1523년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야 할 것]과 [비셈부르크에서의 설교 요약]을 펴냈다. 이 두 작품의 영향을 커서 대성당의 참사회가 개혁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부른 명성있는 설교가 헤디오 역시 "새" 신앙에 가담하게 된다.
당국은 부쳐와 카피토를 청빙하여 성경의 여러 곳들을 공적으로 강해하게 하였다. 이 말씀의 사역자들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자 예배의 개혁이 뒤따랐다. 1524년 초 니그리가 "독일어 미사"를 시작했고, 동년 말, 부쳐는 츠빙글리의 관점을 가지고 스트라스부르 예배의식에 도입된 변화들을 옹호하는 [쇄신의 기초와 명분]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일원들이 기획한 교회의 재조직은 대성당과 교회 참사회 회원들을 불안케 했다. 그러나 당국의 능숙한 타협 끝에 그들은 중립을 지키자 쇄신운동은 승리의 발걸음을 계속했다. 교구개혁과 병행하여 수도원과 학교 개혁도 수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스트라스부르는 황제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스트라스부르는 제2차 슈파이어 국회 때(1529년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은 도시 내부에서도 난관이 있었다. 비록 가톨릭은 이곳에서 신속히 사라졌지만, "열광파들"은 심각한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칼 슈타트가 이곳에 정착하러 찾아왔지만 그는 이내 그의 분리적 행동 때문에 당국에 의해 쫓겨났다. 더 위험했던 것은 재세례파와 온갖 종류의 영성주의자들로서, 이들은 자유스런 분위기를 틈타 도시에 만연했고 심지어 카피토의 동정을 얻기까지 했다.
조명주의가 종교개혁에 퍼뜨린 위험을 막을 목적에서, 부쳐는 시 책임자에게 "열광파들"을 추방하라고 부추겼다. 그는 교회에 치리를 보다 강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1531년 각 목사에게 "감독회"를 딸려 붙여주었으며, 교회에 법적 기능을 부여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조처들은 분파적 운동들을 약화시키고 총회의 주래를 맡은 부쳐의 권위를 강화시키는데 상당히 공헌했다. 그리고 그는 목사들과 필요한 인물들을 키울 수 있는 기관을 1538년 고등교육학교를 창설함으로 해결하였다. 이 학교의 총장은 요한 슈트름이었으며, 부쳐, 카피토, 헤디오, 베르미글리, 그리고 칼벵도 한때 가르쳤다.
스트라스부르가 속해있던 슈말칼덴 동맹이 패배는 이곳의 종교개혁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에 종지부를 찍었다. 1547년 "최고 책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