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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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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21장3절4절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인 새로운피조물 고백기도

 

나는 영생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사탄을 정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나는 믿음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되었습니다.나는 거룩한자입니다.

나는 모든것을 탁월하게 할수있는 은혜가 있습니다.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며 하나님의 생명과본성을 가지고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영생은 나의것입니다.의는 나의것입니다.

죄를 죄거함은 나의것입니다.구원 구출 해방 자유는 나의것입니다.

치유와 신성한건강은 나의것입니다.형통은 나의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권세를 가지고있습니다.나는 아가페 사랑을 할수있습니다.

나는 지혜가 있습니다.나는 상황을 바꾸며 항상 승리하는자입니다.

나는 내인생의 선지자입니다.나는 영혼구원자이며 킹덤빌더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사 우리를 영광스런 아버지 나라로 데려가십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개혁)킹덤빌더교회목사 이상열목사 

                                                                                     

                       기독교신앙상담:이상열목사 010-3438-1859 

 
이상열목사후원 :기업은행 010 3438 1859 이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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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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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킹덤빌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134.114) 작성일16-02-14 15:23 조회428회 댓글0건

본문

 

[성령의 열매 시리즈 ①] 서론 - 예수 나무, 예수 열매
 
류영모
 
존재에 행복을 가져다 주는 행복의 열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에게 열매가 맺힌다. 성령의 열매엔 외적인 열매와 내적인 열매가 있다. 외적인 열매를 성령의 은사라 하고 내적인 열매, 곧 성품의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 한다. 성령의 은사는 사역에 행복을 가져다 주고 성령의 열매는 존재에 행복을 가져다 준다.
능력과 은사는 있는데 열매가 없는 것도 기형이요, 열매는 보이는데 은사와 능력이 없는 것도 기형이다. 은사를 구하는 것만큼 열매를 맺어야 하고 열매가 나타나는 것만큼 능력과 은사도 필요하다. 바울은 고전 12-14장에서 성령의 은사와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 14:1)고 했다. 이는 사랑 즉 성품이 은사보다 낫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성령의 열매를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은 앞으로 4회에 걸쳐 성령의 열매에 대해 영적인 탐구를 시작할 것이다. 본 시리즈가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맺히길 원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또한 성령님이 원하시는 성품을 발산하며 살아가면서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는 계기와 원동력이 되기를 바란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열거하고 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그리고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 그리고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이 아홉 가지 열매를 세 개씩 묶어 정리해 볼 수가 있다. 따라서 4회에 걸쳐 성령의 열매 시리즈를 집필하면서 첫 회는 성령의 열매 서론을, 나머지 3회는 각 회당 한 묶음씩을 주제로 글을 써나갈 것이다.
 
글을 써나감에 있어 각 성령의 열매에 대해 충분한 신학적 탐구를 기본으로 하되 그것을 어려운 신학적 용어로 기술하기 보다는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그들의 실제 삶의 자리에서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그 의미를 해석하고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본 시리즈의 애독자들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지닌 깊은 의미를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평소 상식적인 수준에서 성령의 열매를 이해했거나 또는 그 깊은 성경적 의미에 대해 탐구할 기회가 없었다면 본 시리즈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깊은 통찰과 더불어 말씀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제공해줄 것으로 믿어마지 않는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세 묶음으로 정리해보면,
첫째는 ‘예수님의 품성’을 닮은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다. 이 열매들은 내 삶의 환경에 매이지 아니하고 조건을 뛰어넘어 풍겨나는 그리스도인의 향기이다. 내 영혼에서 솟아나는 사랑과 변하지 않는 기쁨과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화평이다.
 
둘째는 사람들을 대할 때 풍겨나는 그리스도인의 향기 즉 ‘예수 닮은 사람관계’이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이 그것이다. 참아 주기 힘들어도 용서하고 오래 참을 수 있다. 내가 손해보고 위험에 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히 자비를 베풀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선하게 바꾸어 주셨기에 나도 다른 사람에게 양선하게 된다.
 
셋째는 ‘예수님을 닮은 사역태도’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시며 보여주신 태도, 예수님이 사역을 감당하시는 자세이다.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자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가지이지만 ‘열매’라는 말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열매들이 모두 한 가지에서 나오는 아홉 가지 다른 맛을 의미한다. 아홉 가지 맛으로 등장하지만 모두 한 가지 예수 열매라는 말이다.
 
성령의 첫 번째 열매 - 사랑
환경을 초월하는 성령의 열매 - 희락
분쟁의 자리에서도 화평을 만들어 가는 사람 - 화평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 오래 참음 
작은 자에게 베푸는 친절 - 자비
선으로 바꾸사 선한 일을 하게 하신다 - 양선
게으름을 이긴 자에게 주시는 성품 - 충성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역설 - 온유
주신 복을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성품 - 절제
 
열매 맺는 삶을 강조하면서 성경은 늘 꽃과 열매를 대조하고 있다. 꽃을 구하는 인생은 떨어지는 꽃처럼 허무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세상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성경에서 꽃이라는 단어를 약 37번쯤 사용하고 있다. 반면 200번 이상 등장하는 열매는 언제나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이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일컫고 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시들며”(욥기 14:1-2).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편 103:15-16).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야고보서 1:10).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베드로전서 1:24).
 
농부의 소원은 예쁜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소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창 1:11).
복 있는 사람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편 1:3).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언 11:3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오늘 우리 시대는 꽃을 구하는 시대, 순간적이고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구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열매 맺기를 기대하신다. 가을은 모든 나무들이 열매를 내어놓는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은 축복의 계절이요 동시에 심판의 계절이다. 가을 들녘에서 좋은 열매를 많이 내어놓을 수 있는 나무는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흐뭇할까? 그러나 열매를 내어놓을 수 없는 나무는 얼마나 초라하고 한편 부끄럽고 두려울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어 몸부림하고 있는가? 지금 곧 그 몸부림을 중단하고 그냥 예수님을 사랑하라. 예수 열매, 용서의 열매, 사랑의 열매가 저절로 맺혀질 것이다. 
괴팍한 성격과 늘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항상 자신과 싸워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더 이상 자신과 싸우려고 하지 말자. 예수님을 가슴에 더 많이 담으려고 하자. 예수님을 항상 묵상하자. 아름다운 성품의 열매, 예수 열매가 맺혀질 것이다.
 
탐욕, 게으름, 거짓, 부정적 생각, 비난, 이웃과의 잦은 갈등…. 떠나지 않는 허물을 붙들고 발버둥치지 말자. 그냥 예수님을 사랑하자. 그때 거짓된 열매들 대신 예수 열매가 맺혀질 것이다.
예수 열매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품성, 예수님 존재를 닮으면 예수 인격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다. 인격을 닮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던 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하면 그것이 예수 열매이다.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의 열매가 있다. 예수님께 나를 드려 맺는 헌신의 열매가 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줌으로 맺는 선한 열매가 있다. 예수님을 경배하고 찬양함으로 맺는 예배의 열매가 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맺는 기도와 응답의 열매가 있다.
언젠가 내 인생의 마지막 막이 내려지고 하늘로 오라는 종이 울릴 때 우리는 열매를 가지고 가야 한다. 이 세상의 직위는 열매가 아니다. 이 세상 성취도 열매는 아니다. 무엇을 얼마나 얻고 살았느냐 그것도 열매는 아니다. 예수 열매, 곧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천국에 서야 한다.
 
 
 
[성령의 열매②]-사랑ㆍ희락ㆍ화평
 
예수의 품성을 닮은 열매
 
1. 진정한 사랑 ‘아가페’ - 영혼을 살리는 사랑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 앤 셜리반 선생님이 손바닥에 써주는 글자를 통해 수백 수천의 단어를 익혀갔다. 어느 날, 선생님이 손바닥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다. 헬렌은 물었다. “선생님, 사랑이 뭐예요?”
이것은 헬렌 켈러만의 질문이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물어온 질문이다.
영화나 T.V.를 봐도, 소설을 읽고 연극을 봐도, 음악을 들어도 온 세상에 사랑 얘기가 넘쳐난다. 그런데 왠일인지 사람들은 사랑에 목말라 한다. 사랑의 홍수 속에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홍수가 나면 마실 물이 없는’ 것과 같다. 오늘날 지구촌의 문제 -경제문제, 핵문제, 자원 문제, 그리고 온갖 사회문제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문제이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 당시 세상에서 쓰여지던 사랑이라는 단어들인 에로스, 스토르게, 필리아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랑, 기독교적인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세상 문헌에서는 잘 쓰여지지 않던 한 단어를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아가페”이다. 요한일서에는 동사형 ‘사랑한다’(아가파오)가 28회, 명사형 ‘사랑’(아가페)이 18회 등 무려 46회나 등장한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보면 요한일서는 아가페 해설서와도 같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첫 세 개의 열매인 사랑ㆍ희락ㆍ화평은 「예수님의 품성」을 닮은 열매이다. 계명 중 첫번째 계명이 사랑의 계명이고, 은사 중 가장 좋은 은사가 사랑의 은사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린도전서 12:31). 여기 가장 좋은 길이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일컫는다.
 
유대인들은 인체의 뼈 수에 맞추어 248개 조항의 ‘하라’는 적극적 명령과 일년의 날수를 맞추어서 ‘하지 말라’는 365개 조항을 만들어 총 613개 조항의 계율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조항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으로 꼽으셨다.
흔히들 ‘희생적 사랑’을 아가페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희생정신이 들어 있다고 아가페일수는 없다고 말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3).
그러면 아가페란 무엇일까? 첫째,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 4:8,16),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요일 4:7)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요 사랑의 소속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만이 아가페란 뜻이다. 둘째,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고 했다. 아가페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데 있다. 때문에 기독교적 사랑은 구원론적 사랑을 빼고 달리 설명할 수 없다. 구제도 선행도 영혼의 구원이 없이는 아가페가 아니다는 말이다. 남편 아내 가족을 구원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세상적 사랑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2. 환경을 초월하는 종말론적 기쁨 -희락
 
사람들은 행복과 기쁨을 약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복을 만드는 약 - 해피 메이커(Happy Maker)”를 개발했다. 일라이 릴리(Eli Lilly)사의 프로잭(Prozac)이란 약품이 대표적 해피 메이커이다. 인간의 정서를 관장하는 신경전달 물질인 세로토닉을 조절하는 이 약은 슬픔 기능을 약화시키고 우울증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해피 메이커의 효험은 미미한데 부작용은 오히려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령, 총기난동사고를 저지른 사람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약을 장기 복용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한다. 행복이라고 모두 차원이 같은 것이 아니며 기쁨이라고 모두 그 질이 같은 것이 아니다.
기쁨에는 쾌락이 있고 희락이 있다. 쾌락은 순간적인 것이요 희락은 영원한 것이다. 쾌락은 소유를 통해 얻는 기쁨이요, 희락은 존재자체가 기쁨덩어리로 바꾸이어지는 것이다. 환경 안에서 만들 수 있는 기쁨이 쾌락이라면 성령의 임재와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희락이다. 쾌락은 환경의 지배를 받으나 희락은 고통 중에도 맺혀질 수 있는 열매이다. 희락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신령한 기쁨이다. “너는 행복자로다 하나님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자가 누구뇨?”(신 33:29).
멀리서 오는 우리교인에게 한 이웃이 가까운 동네에도 교회가 있는데 왜 그리 멀리 다니느냐고 하더란다. 그래 “뭐라고 했습니까?” 물었더니 대답이 재미있다. “서울 대학교 멀다고 안다녀요?” 그랬단다. 영적 행복감과 충만감 - 이것이 기쁨이다.
 
신약 성경에 “기뻐하라”라는 동사형 카이레인(καὶρειν)이 72번, 명사형 “기쁨” 카라(καρα)가 60번 정도 나온다. 여기 헬라어 “카라”는 세상에는 여전히 모순과 악이 존재하고 내 삶속에 고통이 남아 있지만 구세주가 오신다는 기대에서 오는 기쁨을 말한다. 희락은 종말론적인 기쁨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때로 질병으로 고생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 억울하게 오해받고 실직으로 온 가족이 고난을 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희락의 열매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희락은 환경에 의존하지 않는다. 희락은 견딜 수 없는 시험을 당할 때에도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이다. 희락은 외부적인 환경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과 그분의 약속들이 변함없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희락은 하나님의 뜻이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감정이다. 희락은 인간을 위해 고난받으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마음이다.
 
사도 바울은 “희락”의 깊은 의미를 참 쉽게 설명하고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립보서 4장 4절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한다.
주 안에서의 기쁨! 이것은 '나는 상황의 주인'이라는 선언이다. 환경은 언제나 바뀐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영원한다.
온도계와 같은 인생과 온도조절기와 같은 인생이 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내려가고 날씨가 더우면 올라간다. 이런 사람은 환경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온도계, 주식이 온도계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의 성적이 온도계이다.
그러나 온도조절기 인생은 환경이 어렵지만 기도하며 환경을 극복하고 상황을 이끌어가는 삶이다. 막다른 골목 같지만 창조적이고 긍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가는 삶이다.
 
3. 분쟁의 자리에서 피우는 평화 -화평
 
화평이 그립다. 가인과 아벨 이래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트 교수의 「전쟁의 연구」라는 책에 의하면 1480-1941년까지 460년간 인간들은 약 400번에 걸친 전쟁을 치루었다고 한다. 지난 400년 지구 역사 속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간은 채 3년이 못될 것이라고 한다. 지난 10월 9일 한글날 북한이 핵실험을 한 일로 한국은 물론 세계가 끓고 있다. 그들에게 왜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평화를 위해 싸웠다고 말한다. 모순된 인간의 실존이다.
신약성서에서 “화평”이란 말은 “에이레네”라고 하는데 신약성경에 88번 정도 나온다. 이 말은 구약 “샬롬”을 번역한 말인데 신구약을 합하면 이 평화란 말이 400번 이상 등장한다.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라는 말은 단순히 평화를 즐기는 사람, 평화를 사랑하는 자, 평화예찬론자 정도의 소극적인 뜻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 화해를 창조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알라스카 에스키모인들은 “평화”란 “원수를 친구로 삼는 것”이라고 해석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분쟁이 있는 곳에서 마냥 불안해하는 사람이 아니다. 혼자서 도를 닦고 평화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분쟁의 자리에서도 화평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일찍이 야고보 사도는 Trouble-maker의 장본인으로 혀를 고발한 일이 있다. 입을 조심하지 않고 혀를 함부로 놀려대기 때문에 평화가 깨진다. 우리의 눈이 남의 허물을 보아도 혀로 비판하지 아니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신앙생활에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언어생활에 승리해야 한다. 화평의 열매는 입에서부터 맺혀진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첫째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평이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화목 제물이 되시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의 다리를 놓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고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이 땅의 모든 평화의 기초이다.
 
둘째 화평은 우리 자신과의 화평이다. 리브 만(Joshua Llebman)의 책 「마음의 평화」에 보면 한 젊은이의 소원이 나열된다. 건강, 사랑, 재물, 아름다움, 재능, 권력, 명예. 그러나 한 철인이 젊은이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친구여, 마음의 평화가 없이는 이 모든 것을 즐길 수가 없소.”
 
셋째 평화는 이웃과의 평화이다. 가정 안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불화할 때는 필시 내 마음속에 평화가 없을 때이다.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다. 존 번연의 아픈 고백이 있다. “이상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있다. 마귀와 더불어 대적해야 할 교회와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구나!” 분쟁은 너를 죽이고 결국 나도 죽는 독약과도 같다. 부부간에도 화평하면 “님”이 되지만 화평이 깨지고 나면 “남”이 된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화목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것이 구원이요 영생이요,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을 화목하게 만드는 책임을 맡겨 주셨다 (고후 5:18-20).
 
미국 카네기 공대를 졸업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한결같이 “성공하는 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가 인간관계였다”고 말했다. 우리 주위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여러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어온 것을 본다. 화평은 이처럼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화평의 열매가 나타나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이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성령의 열매 시리즈 ③] 오래 참음ㆍ자비ㆍ양선
 
예수님을 닮은 사람관계
 
 
성령의 열매 그 두 번째 묶음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이다. 이 셋은 그리스도인의 향기 즉 ‘예수 닮은 사람관계’와 관련된 성품이다. 이 세 열매를 각각 정의해보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 오래참음”, “작은 자에게 베푸는 친절 - 자비”, “선으로 바꾸사 선한 일을 하게 하는 - 양선”이라 말할 수 있다.
 
오래 참음 - 하나님을 확고히 신뢰하고 기다리는 삶의 태도
 
옛 국어교과서에 ‘은근과 끈기’라는 장이 있었다. 구한말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특징적 성품이 ‘은근과 끈기’였다. 그러나 요즘 세계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빨리빨리” 한국인일 것이다.
한국어에는 조급증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아주 발달되어 있다. “빨리 빨리, 날쌔게, 얼른, 금새, 당장, 성큼, 선뜻, 후딱, 속히, 즉시, 신속하게, 잽싸게.”
이러한 조급증이 신앙생활에서도 나타난다.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응답을 기다리지 못한다. 교우들과 조그만 갈등이 있으면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버린다. 긴 설교도 참지 못하고 전도를 하면서도 너무 쉽게 포기한다. 불신자 전도를 위한 가장 소중한 성품 가운데 하나가 인내, 오래 참음이다.
야고보서 5장 7-11절까지 다섯 절 가운데 오래 참음과 관계된 단어가 여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다. 한자어의 참을 인(忍)자는 마음심(心)자 위에 칼도(刀)자를 쓰고 있다. 참는다는 것은 “칼로 마음을 베는 것처럼 아플 수 있다”는 뜻이다. 오래 참음은 고통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면 “오래 참음”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야고보서 5장 1-6절은 “원망”이라고 말한다. 품꾼이 삯을 받지 못하는 억울한 일을 만나면 분통이 터지고 억울해서 원망하게 된다. 그래도 원망하지 말고 오래 참으라고 한다. 아담이 하와를 원망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깨졌다. 걸핏하면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은 “저는 성격이 아쌀해서 뒷끝이 없습니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결과 아픔은 오래 간다. 엽총도 마찬가지다. 한 방에 끝난다. 오래 안 걸린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로마서 9장 22절은 “하나님은 오래 참음으로 관용하신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잠언 19장 3절은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고 말씀한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원망은 미련한 인간들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말이다.
성경 주석가 버튼(E.D. Burton)은 오래 참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억울한 상황, 곤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확고히 신뢰하고 기다리는 삶의 태도이다.”
성경에서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오래 참았던 사람들이었다.
 
성령의 사람이 가지는 오래 참음의 열매가 어디서 나타나게 될까? 첫째, 내가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신뢰하고 참게 되고, 둘째는 한 번의 실패를 영원한 실패인 양 절망하지 않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참게 된다. 셋째,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래 참게 된다. 사랑은 성내지 않으며 모든 걸 참으며 모든 걸 견딘다. 어버이가 된 사람들은 자녀를 향하여 오래 참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부모의 조급증과 지나친 기대 때문에 자녀의 성품과 비전과 재능이 무너진다.
 
강철왕 카네기 사무실에는 밀물에 밀려나온 배 한 척이 모래사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림이 있었다. 그림 밑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밀물의 때는 반드시 찾아온다.” 곤고한 하루 하루를 살아갈지라도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의 밀물이 당신에게 반드시 찾아오게 하실 것을 믿고 나아가자. 씨를 뿌리고 오래 기다리는 농부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참았던 선지자들처럼, 극한의 환란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한 욥처럼.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히 12:2) 예수님처럼.
오래 참는 그 기간은 의미 없이 힘들기만 한 기간이 아니다. 내가 하늘을 나는 믿음의 날개를 다는 기간이다. 그리하면 주께서 주시는 아름다운 결말을 보게 된다(약 5:11).
“나는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에도 구름 저 건너편에 태양이 있음을 아노라. 나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실 때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노라.”
‘홀로코스트’ (Holocaust) 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끝까지 신뢰하고 오래 참았던 한 무명 신앙인이 남긴 글의 일부이다.
 
자비(친절) - 선한 마음의 표현
 
자비는 헬라어로 “크레스토테스”라고 한다. KJV에서는 “gentleness”(온유함, 관대함)으로 번역하고 있고, NIV 성경에서는 “kindness” - “친절”이라고 번역한다. 모든 사람, 특별히 긍휼이 필요한 작은 자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자비이다.
 
신명기 24장 19절은 자비의 모델, 곧 시청각적인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19절). 감람나무 열매나 포도 한송이를 떨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고 한다. 이 명령 앞에 우리는 낙심하고 절망하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적이요 저마다 내면 깊은 곳에 이기심이 도사려 있음을 모르신단 말인가? 그러나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 자비는 성령의 열매이다. 내가 맺고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열매이다.
 
다윗은 자비의 역할모델(role model)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다. “은총”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이다. 구약성경에 250번 나오는데 신약의 크레스토테스 - 자비와 같은 뜻이다.
 
어떻게 우리가 자비할 수 있을까? 내가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오늘도 살아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때 성령님이 내 안에서 자비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예수님의 자비가 내 안에 가득 채워지고 성령님이 임하셔서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주시면 나를 통하여 자비가 이웃에게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자비는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작은 친절로 나타난다.
성경에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이 없다. 누구든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라고 하신다. 빅토리아 여왕이 나이팅게일에게 준 훈장엔 이런 글귀가 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뿐이 아니다. 말로도 할 수 있고 돈으로도 할 수 있다. 돈도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은 눈물로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어루만지고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외로운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셨다. 예수님은 주린 자를 먹이셨다. 예수님의 자비는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는 마음이었다. 가장 좋은 자비는 예수를 나누는 것이다. 신명기 24장 19-22절 말씀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명한다. 누가 나그네인가? 피곤한 인생길 내 영혼이 쉴 곳 아버지의 집, 교회를 모르는 사람이 객이요 나그네이다. 누가 고아인가?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영혼의 고아이다. 누가 과부인가? 예수 신랑 모르고 버림 받은 인생이 과부이다. 사랑, 후회도 실망도 없이 보람 있는 자비,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복음은 주는 기쁨이 있고 받는 자도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얻는다.
 
양선 - 선의 행동적 표현
 
양선이란 헬라어로 “아가도쉬네”로 영어(NIV. KJV)로는 “goodness”(선행)으로, 표준 새번역에는 “선함”, 공동번역에는 “선행”이라고 번역했다. 문자적으로 양선이란 “선을 베푼다”는 뜻이다.
자비의 열매와 양선의 열매는 형제 자매와도 같이 닮은 데가 많다. 자비는 “선한 마음의 표현”을 말하고 양선은 “선의 행동적 표현”을 말한다. 양선은 곧 행동하는 사랑이다.
초대교회는 양선의 열매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
 
초대교회는 생명을 걸고 복음을 나누었다. 힘껏 물질을 나누었다. 사랑을 나누었다. 성도가 가는 곳마다 양선의 열매가 풍성했다. 어디든지 선행이 있었다.
 
선의 세계에서는 악이 무엇인지 알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악을 알고 나면 결국 선행이 불가능해 진다. 이때부터 인간은 선행불가의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이 없는 선행,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선행은 결국 율법을 만들게 되고 종교의 영으로 발전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를 만들게 된다. 그것이 사탄의 전략이었다.
 
창세기 50장에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란 요셉의 신앙고백이 나온다. 악한 환경을 선한 환경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오신 분이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운명이 바뀌어진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말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바꾸어 주리라” 하는 약속이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엡 2:10).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 중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해 바다는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지 내보내질 않기 때문에 죽은 바다이다. 생물들이 살 수 없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는 많은 물들을 받아들이지만 계속해서 물을 내어 보낸다. 때문에 거기에는 생명이 풍성하고 많은 물고기들이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이다. 우리가 이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의 자원을 나누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역 그것이 바로 양선이다.
 
 
 
성령의 열매 시리즈 ④] 충성ㆍ온유ㆍ절제
 
예수님을 닮은 사역태도
 
 
 
 
우리는 지금 성령의 열매들을 묵상하고 있다. 9개의 열매 중 첫 번째 바구니에 담겨있는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 즉 ‘예수님의 품성’을 닮은 열매들이다. 두 번째 바구니에 담긴 열매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즉 사람들을 대할 때 풍겨나는 그리스도인의 향기 - ‘예수 닮은 사람관계’이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묵상할 열매는 ‘예수님을 닮은 사역태도’인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충성이란 헬라어로 “피스티스”라고 하는데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에서는 “충성”으로, 공동번역에서는 “진실”로, 표준번역에서는 “신실”로 번역했다. 영어로 믿음이 “faith”라면 충성은 “faithfulness”이다. 충성이란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신실하게 믿을 만하게 감당하는 자세를 말한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한다. 충성을 착함, 선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선이 사람들을 향할 때 자비가 되고 양선이 된다. 그러나 선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대할 때 충성이 되는 것이다. 소인은 크고 특별한 것에만 충성하고 위인은 평범한 것에도 충성하고 성자는 작은 것에 크게 충성한다는 말이 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의 반대어구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충성의 반대되는 말이 “반역”이 아니라 “게으름”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에 깊은 영적 교훈이 있다. “충성”의 대적의 정체를 벗겨보니 “게으름”이라는 것이다. 게으르면 충성의 열매는 맺혀지지 않는다. “부지런함을 가장한 게으름”이라는 말이 있다. 엉뚱한 일에 바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바쁜 것은 충성의 열매가 아니라 육체의 열매이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몸이 게으르다고 혀까지 게으르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게으른 자일수록 핑계를 대는 입은 더욱 분주한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비판하기에 바빴다. 감사엔 게으르고 불평하기에 바쁘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에 바빴다.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내기에 바빴다.
 
이제 결론은 자명해졌다. 충성의 열매가 무엇일까? 게으름을 이긴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열매, 예수님의 성품, 하나님의 선물이다.
 
 
온유 -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역설
 
기독교에는 파라독스가 있다.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라. 살고자 하면 죽어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강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정복한 것이요”라는 말이 더 맞지 않을까?
 
유능승강(有能勝剛)이란 말이 있다. 유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이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게 되어있다. 눈이 쌓이면 부드러운 가지는 휘어지나 딱딱한 가지는 부러진다. 그렇게 부러진 가지를 설해목이라고 한다.
온유란 헬라어로 “프라우테스”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gentlness”(NIV. 점잖음) 혹은 “meekness”(KJV. 부드러움)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우유부단한 성격을 의미하거나 연약한 이미지를 가진 말이 아니다. 이 말의 어원적 배경은 벌판을 질주하던 야생마를 길들여 교통수단으로 쓰게 되거나 달아오른 열을 진정시켜 정상온도가 된 것과 관련이 있다. 본능적인 행동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길들여지고 잘 훈련된 성품,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다스리고 통제하시도록 내어 맡긴 삶이 온유이다.
온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중생한 결과로 나타나는 성품이다. 온유의 뿌리는 성령이다. 말고의 귀를 잘랐던 베드로도, 성도를 잡아 죽이고 옥에 가두던 바울도 온유해졌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앞에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 그의 온유하심이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다.
 
산상수훈에 8가지 복이 나오고 갈라디아서에서 9가지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데 그 중 공통된 것 두 가지가 있다. “평화와 온유”이다. 즉 복 받은 사람, 성령 받은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온유”라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우선 언어가 부드럽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관계가 부드럽다. 온유한 사람은 사고방식에 유연하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여기서 땅은 보통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땅,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온유한 자는 하늘나라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온유한 자는 또한 이 세상에서도 땅을 차지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땅의 선택권을 양보함으로 더 좋은 땅을 차지했다.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이 터졌다. 놀라운 사실은 온유함으로 양보하는 길이 천국에 가까워지는 길이었다는 사실이다. 온유한 자가 차지하는 또 다른 땅이 있다. 곧 사람이다. 많은 주경가들이 마태복음 5장 5절의 땅은 “사람이다”라고 단언한다. 온유한 자가 사람을 차지한다. 온유한 사람 곁에는 사람이 몰려왔다. 온유한 자는 공동체를 차지하고, 환경을 차지하고, 말씀을 차지한다.
 
옛날 우리나라 개들은 모두 온순했다. 그 온순함에도 똥개형이 있고 진돗개형이 있다. 진돗개는 평상시 그리고 주인 앞에서는 한없이 온순하지만 주인을 위해서는 그리고 주인이 명령한 사명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때는 맹견이 된다. 이것이 온유이다. 그러나 똥개는 아무에게나 꼬리를 친다. 주인과 도둑도 분간을 못한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꼬리를 내리고 깽깽거린다. 온순은 될지 모르나 온유는 아니다.
 
 
절제 - 주신 복을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성품
 
돼지들이 과식을 해서 배탈이 났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먹는 것이든, 일하는 것이든, 말하는 것이든 절제하지 못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소를 본 적도 없고 과로로 쓰러지는 개미를 본 적도 없다.
절제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도 같다. 인생의 과욕을 조절하여 인생이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품이 절제이다. 절제란 헬라어로 “엥크라테이아”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self-control”(NIV) 혹은 “temperance”(KJV)라고 한다. “자기 스스로를 알맞게 잘 조절한다”라는 뜻이다.
왜 절제의 열매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맨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을까? 다른 여덟 가지 열매는 신구약 성경에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절제는 복음서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구약 성경에서도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절제의 열매가 마지막에 언급된 것은 절제야말로 다른 열매를 완성시키는 열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홉 가지 열매의 매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절제는 다른 열매들을 담는 바구니와 같다. 다른 열매가 꽃이라면 절제는 그 꽃들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성령의 열매가 맺혀도 담을 그릇이 있어야 한다. 절제가 없다면 모든 열매가 쏟아 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절제가 없다면 아이를 망치고 말 것이다. 절제가 없는 기쁨은 너무 가볍다. 절제가 없는 화평은 태만이 될 것이다. 절제 없는 인내는 무감각 인생이 되게 한다. 절제 없는 자비나 양선은 의존적 거지 근성을 만들 것이다. 절제가 없는 충성은 과로를 가져올 것이다. 절제가 없는 온유는 부드러움이 아니라 유약한 인간을 만들어 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의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도 절제의 계명이었다. 예수님도 절제의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본능적 유혹을 절제한다. 절제는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이기는 승리의 길이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이 본능적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은 본능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절제가 복을 담는 그릇이라면 절제의 그릇을 찢는 칼이 있다. 첫째는 생각이라는 칼이다.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통하여 역사한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두 번째 마귀는 감정과 욕망이라는 칼로 절제의 그릇을 찢는다. 셋째 우리의 말과 일상적인 삶을 절제하지 않으면 행복의 그릇이 찢어진다. 야고보서 3장 6절에서 “혀는 불이요 이것은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했다.
어떻게 우리가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절제의 시험을 받으시기 전 세례를 받으실 때 이미 성령이 임하셨다. 성령님이 절제를 도와 주셔야 한다. 그래서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다.
이제 성령님이 임하셨으면 이미 내 안에 절제의 권세가 있다. 절제의 씨가 뿌려진 것이다. 제네바 개혁 때 칼뱅은 절제를 가르쳤다. 청교도들의 삶의 원리는 정직, 근면, 절제였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절제이다. 그들은 “Lordship - 주권의식” 즉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쓰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는 자세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나의 소유주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잘못된 삶의 자세이다.
절제의 열매는 한 개인의 복을 담는 그릇이 될 뿐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복을 담고 그 복을 지키는 능력이 된다.
그러나 이 복과 권능을 지키는 그릇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절제이다. 무엇보다 주신 복을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성품이 지금 필요하다.
 
그동안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열매에 대해 4회에 걸쳐 연구했다. 성령의 열매를 연구 묵상하면서 본인은 성령 체험, 성령 충만을 “신비”와 “은사”가 아닌 “열매 맛보기”로 이해하고 접근했다. 성령 충만을 내 안에 열리는 성품의 열매로 이해하고 그 열매의 맛을 보고 그 열매의 향기를 따라 삶을 살아가는 길로 이해했다. 이런 통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독자 여러분께도 많은 묵상의 자료를 제공한 기회가 되었길 바란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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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성령님과 동행하는 나에게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13.나는 아가페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14.내안에는 믿음이 있고 나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PgJuiA-VR4&list=PLQbQC5EwiO6SPzjrLHRedrm_dNfAOy6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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