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이 말하는 ‘정의’의 의미 -창세기 38: 24-26의 문맥에서- > 기독교 귀신 질병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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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의표적과 기적이 있는교회

믿음과 사랑의교회     영혼구원하는교회

 

킹덤빌더교회후원: 기업은행 238-044092-01-012 이상열

 

기독교신앙상담:이상열목사 010-3438-1859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 모든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에 모든병을 치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찔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사 우리를 영광스런 아버지 나라로 데려가십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로운피조물 고백선포기도

1.나는 새로운피조물로서 하나님의본성과 생명을 가지고있습니다.

2.나는 하나님의걸작품이며 하나님의 의로 의로워졌습니다.

3.나는 죄로부터 깨끗히 씻겨졌습니다.

4.나는 어둠에권세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5.성령께서 내안에 거하십니다.

6.그리스도 예수안에있는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7.나는 생명안에서 다스리는자입니다.

8.나는 의인입니다.나에게는 더이상 정죄가 없습니다.

9.치유와건강 번영 형통 기쁨은 나의것입니다.

10.나는 모든일에 승리하는자입니다.

11.나는 아가페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12.성령님과 동행하는 나에게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13.나는 아가페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14.내안에는 믿음이 있고 나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킹덤빌더교회후원: 기업은행 010 3438 1859 이상열

하나님의 걸작품 


하나님의 걸작품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감사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하나님의 출발점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손과 발이다
나는 하나님사랑의 산물이며 위대함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중요한 사람이며 가치있는 존재이다
나는 새언약의 일꾼이며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멋진인생을 산다
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았기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왕노릇한다
나는 십자가신앙과 부활신앙위에 보좌신앙으로 다스리며 살아간다
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았다
나는 생명과 경건에속한 모든것을 받았다
만물이 나의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며 축복 그 자체이며 축복의 분배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 곧 자비와 은혜와 사랑과 의를 나누어 주는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밖으로 나오는 통로이며, 나는 세상을 향해 뻗으신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다
나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자이며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다
나는 남을 세워주고 격려하며 축복의
말을 하는자이다
나는 예수이름으로 승리하며 정복하며
통치한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지음 받은 독특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나는 아름답고 위대하며 보배롭게 창조되었다
나는 생명과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다
나는 능력과 부요를 위해 창조되었다
나는 성공과 번영을 위해 창조되었다
나는 존귀함과 신성함을 위해 창조되었다
내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제한이 없고 영혼을 치유하며 세워주고 축복한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달된다
나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과 의와 탁월함과 통치로
살아간다
나는 구원받았고 영생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은혜로 살아간다
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믿음과 은사를 가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
나는 가치있고 소중하며 중요한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존중 하시는 것을
나도 존중하고,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을 나도 가치 있게 여긴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으시고 신뢰하신다
나는 고귀한 하나님 왕가의 일원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과 나를 위해 값을 치르셨다는것을 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나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
나는 하나님의 창조의 왕관이며 모든 피조물중에 최고이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며 형상이다
나는 하나님의 독특한 보물이며 값진진주이다
나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이름으로 한다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으로 살아간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며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다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상속자다
나는 영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이다
나는 메뚜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사이다
나는 차고 넘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것을 받았다
나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위에서 왔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권세와 권능으로 상황과 환경을 다스리고 통치하며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다
나는 영혼구원자다
나는 하나님의 의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앞에 아무런 정죄감이나
열등감없이 설수 있다
나는 치유자이다
형통과 번영은 나의것이다
건강과 부요도 나의것이다
나는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간다
나는 죄사함을 받았다
나에게 정죄함이 없으며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다
나는 고귀하고 존귀하며 겸손하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나는 거룩하고 의롭다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것을할수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결코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간다
내안에 계신 성령께서 마귀보다 크시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넉넉히 이긴다
나는 강하고 담대하다
나는 부요하고 건강하며 신성한 생명으로 살아간다
나는 용서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
나는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과 하나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간다
나는 약함과 패배와 가난과 질병을 거부한다
나는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간다
나는 복음을 전파하며 영혼을 이겨오는 자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나의 모든 쓸것을 채우시리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나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
나는 독특하며 특별하고 우월하다 나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이다
나는 특별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가운데 첫째요 최고이다. 나는 신성의 탁월함과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선전하도록 부름받은 하나님의 가장 보배롭고 훌륭한 소유이다
나는 정복자보다 나은 자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씨이다
나는 성공이다
아픔을 없애고, 질병을 물리치며, 마귀를 쫓아내는 하나님의 생명이 나의 모든 존재와 몸의 모든 뼈와 혈액세포에 있다
나는 복을 받은 자일 뿐만 아니라 복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누어주는 자이기 때문에 내가 만지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가난대신 부요를 주셨고
질병대신 건강을 주셨고 죽음대신 영생을
주셨다
나는 주는자이며 헤아리고 심는자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하시며
모든것에 넉넉하게 하여 착한일을 하게하신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쓸것을 채우신다
예수가 가난하게 되심은 나를 부요케 하심이다
예수가 오신것은 나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다
나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의뢰한다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것을 할수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이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다
나는 믿는자이므로 이런표적이 나에게 따른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자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한다
내가 땅에서 매는것은 하늘에서 매이고 내가
땅에서 푸는것은 하늘에서도 풀린다
그러므로 주 예수이름으로 나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결박하노라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결박하고 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결박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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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귀신 질병치유

구약이 말하는 ‘정의’의 의미 -창세기 38: 24-26의 문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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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킹덤빌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134.114) 작성일16-02-14 14:53 조회327회 댓글0건

본문

구약성서가 말하는 ‘정의’(正義)의 의미에 관해서는 20세기 최고의 구약성서 신학자로 알려진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가 자신의 대표적 저서『구약성서신학』 제1권(1957)에 실은 「야훼와 이스라엘의 의」라는 논문에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철학 강의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2009, 한국어 번역은 2010)라는 강의록 저서가 제기한 ‘정의’이해도 폰 라트의 ‘의’(義)의 이해와 밀접하고도 깊은 연관을 가졌다는 점에서 구약성서의 정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더 언급해 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주제는 5.16 군사정부의 유신체제 하에서 큰 수난을 받고 있던 1960-70년대의 한국신학대학--신암교회가 속한 교단의 신학대학--의 수업시간에서도 온갖 논란을 야기 시켰던 주제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당시 한신대에서는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의거한 정의개념이 논의의 대세를 이루고 있어서, 사회정의라는 이슈는 마이클 샌델의 변증법적 정의 이해와는 상당히 다른 문맥 안에서 갈등과 고뇌를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한신대의 젊은 지성들에게는 당시 사회정의를 짓밟는 유신이념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불의로 확고하게 규정되었고, 유신이념에 대한 동조는 물론이고 유신 이데올로기에 대한 털끝만큼의 동정이나 관용도 또한 무조건 불의 또는 악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신대 신학생들은 그들이 절대 악(絶對 惡)으로 규정한 유신이념에 혹 적극적으로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 때문에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사랑정신까지도 어용논리라고 하는 주장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최근에도 그런 유형의 논의가 또 하나 나타났는데, 이른바, 가톨릭 정의구현 사제단의 정의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것입니다. 즉 최근 천안함 사태 및 연평도 사건에 대한 이해 때문에 국민들 간에 국론 분열적인 좌 우 이념대결이 극대화될까 염려하여 추기경이 직접 나서서 어느 한 쪽으로든 너무 치우치지 말기를 국민들께 권고한 것에 대하여 그 사제단이 강력히 비난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추기경의 시국관이 정의구현 사제단의 좌 편향적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 미온적일 뿐만 아니라 어용(御用)이 될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한 셈입니다. 그러나 한 야당 국회의원은 이러한 정의구현 사제단의 입장을 오히려 비판하면서, “진정으로 정의를 구현하려면 남한에서 그러지 말고 북한으로 가서 순교할 각오로 북한 동포의 인권을 위하여 싸우라”고 맞받아치고 나왔습니다. 이 경우에도 소위, ‘정의’에 대한 이해란, 관점에 따라선, 이데올로기 간의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분위기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있는 가운데 하버드대의 20년 연속 최고의 명 강의록이라고 선전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2010년의 한국 독서계에 도도하게 등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회자(膾炙)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한국사회 만큼 이토록 국가존립을 위협할 정도로까지 지독한 이념대립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나 하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더욱 좌절케 하는 것은 흔히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일컫는 법조계의 현실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개탄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그 점입니다. 즉 2006년 4월 26일자의 한 일간신문에「나는 고발한다, 법조계를!」이라는 칼럼을 기고했던 한림대 김인규 경제학 교수가 5년이나 지난 뒤인 금년(2011) 2월 14일자 신문을 통하여서는「나는 다시 고발한다, 법조계를!」이라는 글을 통해서 피에 맺힌 절규를 다시 하고 있었다는 데서 그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한국인 민사소송의 80%는 가난한 민중들의 ‘나 홀로 소송’이고 나머지 20%의 대부분은 ‘전관예우의 악한 관행을 이용한 돈 많은 자들의 자명한 무죄보장 전제의 소송’이라는데, 이런 절망적인 ‘정의부재’의 한국 법조계를 보고서도 이 사회를 여전히 공정한 사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대통령, 국회의원 그리고 법조인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정의부재’의 사회로 만드는 바로 그 주범들”이라고 비장하게 성토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요? 실로, 시간 또는 세월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무소불위의 인간세계를 통치하고 계시는 역사의 유일한 주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의(義)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대답을 찾기 위하여 우선 창세기 38장에 나타난「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에 관한 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성서가 말하는 ‘정의와 그 현실’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더 논의해 보는 것도 시의적절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에 관한 증언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초기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族長)이었던 유다는 가나안 복지를 향한 이주과정 중에서 야훼의 이스라엘 구원사의 중심 역할을 하는, 이른 바, 가문의 대(代) 잇기가 위기에 직면하자, 즉 첫 아들이 대를 잇지 못하고 죽게 되자, 족장 유다는 후사를 남기지 못하는 비극을 극복하기 위하여 레비리트 법에 따라, 대(代)를 잇지 못하고 죽은 맏아들을 대신하여 둘째 아들을 며느리 다말에게 남편으로 내어주지만, --Levirate law는 형이 대(代)를 잇지 못하고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와 동침하여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주는 관습법임, 신 25:5-10; 마 22:23-33; 막 12:18-27; 눅 20:27-40 참조-- 그러나 유다의 둘째 아들마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창 38:9 참조). 그러자 유다는 남은 셋째 아들마저 며느리 다말에게 주었다가는 그도 형들처럼 대를 잇지 못하고 죽을까 염려하여 ‘셋째 아들이 성인(成人)으로 장성할 때까지’라는 조건을 붙여 며느리를 친정으로 쫓아냅니다(창 38:11). 



그러나 유다의 이런 조처가 한 지파의 족장으로서는 전혀 올바르지 않은 처사라는 것이 곧 밝혀집니다. 왜냐하면, 셋째 아들이 다 장성하였음에도 그는 며느리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 셋째 아들을 남편으로 짝지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아무 죄도 없는 며느리를 마치 살(煞)이 낀 재수 없는 여인처럼 생각하여 셋째 아들이 다 장성하여 성년이 된 후인데도(창 38:12a) 며느리를 시가(媤家)로 불러오는 일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또 가문의 대(代)가 끊어질 이런 구원사적 위기를 아무 대책도 없이 방치(직무유기)한 채 오히려 그는 전혀 딴전만 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유다는 아내가 죽자 곡(哭)하는 기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문의 대(代)를 잇게 하는 이 중대한 일에는 조금도 관심 없이, 단지 딤나로 가는 길 가에 앉은 한 여인(cf. 렘 3:2; 겔 16:25b)에게로 접근하여, 그를 창녀로 잘못 알고(창 8:15), 탐욕스러운 수작을 거는 부끄러운 사내(창 38:23)가 되었고, 또 길가에 앉은 그 변장한 여인이 다름 아니라 가나안 종교의 ‘신전 여인’(가나안 신전[神殿]에서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제의[祭儀]에 종사하는 성창[聖娼]; 창 38:14-22 참조)으로 위장해서라도 가문의 대를 이어 줄 속량자(‘꼬엘’)를 찾는 자(룻 3:9)가 되려고, 즉, 기울어져가는 시가(媤家)의 가문을 일으켜주기 위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레 20:10; 신 22:22-24)까지도 감수하고 변복(變服)하여 길거리에 나선 자기의 며느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은 이스라엘 족장으로서는 결코 범해서는 안 되는 치명적인 범법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유다는, ①레 18:15에 의하면, 며느리를 범한 ‘성결법전의 위반자’가 되었고 또 ②출 21:7,14; 22:22에 의하면, 창녀와의 성관계를 금하는 ‘계약법전의 법도 어긴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진실로 야훼 신(神)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출 33:19 참조). 다말은 시아버지와의 성관계라는 그 수치스러운 행위를 감내함으로 오히려 이스라엘 가문을 살리는 주역--가문의 대를 이어줄 속량자(꼬엘)를 발굴해낸 사람--이 되었고 또 유다 가문의 대를 출산하는 의(義)를, 즉 유다의 건장한 두 아들이 연쇄적으로 죽음을 당하면서 까지도 성취해내지 못한 그 일을 며느리 다말은 비록 이방인 여인의 몸이었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창 38: 18-19) 성취해낸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이러한 의거(義擧)를 간음행각으로 오해하고 정죄하며(창 38:24), 또 마치 자신의 부끄러움(창녀와 관계를 가진 것)은 감추기라도 하듯이,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어깃장을 놓으며, 제사장의 딸이 간음할 때에나 벌을 내리는 화형의 극형(레위기 21:9)으로 다스리려 하는 그런 그 뻔뻔스러운 시아버지의 면전에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로부터 받은 몸값, 그러나! 그것은 결코 화대(花代; 해웃값)가 아닌! 단지 ‘꼬엘’(속량자, 대속자)의 신분증인 시아버지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창 38:18,25)를 꺼내보였던 것입니다!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신분증으로 사용하는 관습은 고대 바빌로니아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전수된 것인데, 비록 시아버지 유다는 그것들을 지불해야 할 화대(花代)의 차용증서로서 내놓았지만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가 잊고 있는 가문의 대(代)를 잇게 해주는 ‘꼬엘’(대를 이어 줄 속량자)의 신분증으로서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승리는 시아버지 유다의 것이 아니라 이방인 며느리 다말의 것이었습니다. 족장 유다는 그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밝혀주는 확실한 증거물인 것을 곧 알아차리고 즉시 저 이방인 여인 다말에게 항복하고 며느리의 의(義)가 승리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맙니다. “차드카 밈멘니!”(축자적 번역: 그녀는 나보다 의롭도다! 창 38:26a)



그렇다면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은 며느리 다말의 이 행위가 어찌하여 의(義)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또 메시아 예수의 족보를 이어가게 하는 첫 번째 여성으로서(마 1:3) 도도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구약성서는 단호하게 다말의 이 행위를 의로운 행위라고 말하고, 뿐만 아니라, 그 의(義)가 이스라엘의 대표적 족장 유다를 이겼다고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 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또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정의를 다루던 그 문맥과는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딜레마의 현실은 사실 정의에 대한 개념정의가 갖고 있는 바의 본질이요 그 진정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성서의 현실이 그러하고 또 마이클 샌델의 정의이론의 현실이 또한 그러합니다. 말하자면 ‘의(義)’는 구원을 지향하는 것이지! 결코 단순한 흑백논리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성서의 현실이 갖고 있는 그 고유한 특징인 것입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에 대한 해석은 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추구, ② 개인의 자유와 권리 존중, 그리고 ③ 도덕적 이상(理想)을 충족시키는 미덕 추구, 이 세 가지 모두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충족될 수 있는 정의이론이 어디 있는지를 찾는 다소 복잡하고도 변증법적인 작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러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행복추구, 마이클 조던의 자유시장 철학이 추구하는 것, 임마누엘 칸트의 최선의 도덕적 동기, 등등의 각 정의이론들에 대하여 마이클 샌델은 시시비비를 장시간 토의하게 하여 그 복잡한 토론들 속에 나타난 딜레마들을 헤쳐 나가게 한 후에야 비로소 최선의 해석을 도출해 내도록 하는 그런 방법으로 정의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진지한 토의와 대화를 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우리의 결론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에서는 의견을 같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첫째로① 정의는 적어도 정적(靜的)인 논리개념이나 도덕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역동적(力動的)인 성격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다말 기사에서처럼 정의는 통속적이고도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범주에서는 분명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둘째로② 정의는 결코 더 이상 흑백논리의 이분법으로서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 국회(國會)가 보여주는 바, 합(合)을 결사 거부하는 정(正)과 반(反)의 목숨 건 이전투구는 분명 정의구현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성서는 정의(正義) 이해를 결코 어떤 개연성에 맡겨 두거나 또는 그 어떤 극단적 흑백논리에 맡겨 두지는 않습니다. 성서는 많은 법 자료들, 역사 자료들, 예언 자료들, 시와 지혜의 자료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사건에 이르기까지 매우 일관되게 정의에 관하여 증언해온 바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정의는 성서에서는 철저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기초로 한 관계개념으로만 설명되어 왔습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철저히 유한한 존재(‘땅의 먼지’;창 2:7; 3:19; 시 90:3)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즉 더불어 살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창 2;18; 레 19:17-18→눅 10:25-27), 독자적인 한 개인 개체의 도덕성 만으로서는 결코 의(義)를 일구어낼 수는 없다고 성서는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14:3; 53:3; 롬 3:10-18; 7:18 등등 성서 도처에서는 분명한 언어로 “의인은 없다!”라고 단언하였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단호한 어조로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막 10:18)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의(義)를 교육하는 하나님의 법의지(法意志)인 그 ‘토라’를 ‘주시는 분’과 그리고 그 토라를 통하여 의(義)로 교육(가르침)을 ‘받는 자’ 사이의 관계라는 ‘관계맥락’에서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의(義)를 가르침 받는 인간의 경우는 의를 가르치는 자이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는(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mimesis를 통하여!)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의(義)는, 이런 의미에서 볼 때는, 불확정의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의(義) 개념도, 다말의 의(義) 개념도, 율법자료(律法資料)들의 의(義) 개념도 그리고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의 사건(눅 23:47 cf. 마 27:54; 막 15;39)이 지닌 의(義) 개념도 모두가 다 의(義)를 어디까지나 관계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예수를 보고 한 이방인 백부장이 “그는 참으로 ‘의인’이셨다.”(눅 23:47)라고 증언한 것은 바로 이 사실, 즉 인류를 구원키 위한 대속의 죽음을 요구하신 하나님의 의(義)의 요구에 복종하신 예수의 그 복종사실(빌 2:18)을 두고서 증언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의(義)는 그 인간본성의 도덕성만으로는 결코 성취될 수 없고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모방의 복종(Imitatio Dei, cf. 마 5:48)을 통하여서만 비로소 의로 인정받는[義認받는] 것일 뿐입니다. 다말의 의(義)도 바로 이 때문에 의(義)인 것입니다. 다말의 의는 일반적 성(性) 모럴의 범주를 넘어선 것으로서 공동체(유다 가문)의 절박한 구원 요구에 성실히 응답하였다는 그 공동체와의 관계의 맥락에서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마이클 샌델의 경우, 여기서도, 그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그러면 무엇을 의미하나?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성서는 매우 확실한 대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의 의는 태초의 인간창조 때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이르기까지 의(義)의 길을 간단없이 ‘가르쳐 오신 하나님과 가르침 받아온 인간’ 사이의 ‘구원자와 피(被)구원자’ 사이의 관계라는 맥락(救援史 神學) 안에서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는 인간구원의 역사(救援史)라는 맥락 안에 어김없이 붙박이처럼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는 그러므로 줄곧 인류와의 구원사적(救援史的) 관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의가 고백되고 찬양되어 왔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義)조차도!! 관계의 맥락 안에서만 의(義)라고 고백되어 왔던 것입니다. ‘구원’을 일구어내지 않는 것은 성서에서는 그 어느 것도 결단코 의(義)라고 칭(稱)해지지를 않습니다. 소위,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는 것은 그러므로 구원사의 맥락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의(義)는 전적으로 ‘구원 지향적(salvation-oriented)인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48:9-11은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역사를 통하여 “구원을 베풀어야 할 자에게는 기필코 성실하게 구원을 베풀어 오셨기 때문에”(출 33:19) 그의 오른 손에는 정의가 가득 차 있었다고 고백되었고 또 주의 “공의 때문에! 시온, 즉 선민(選民)의 예배 공동체가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찬양되었던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선택-출애굽 구원-출바벨론 구원-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교회의 구원선교에 이르는 ‘야훼의 구원 역사’에 대한 성서의 응답은 전적으로 그분 하나님의 의(義)의 역사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문맥에서는, ‘정의’란 이러한 구원관계의 현실을 떠나서는 결코 의(義)라고 말해지지는 않습니다. 즉 성서의 의(義)는 결코 그 어떤 절대적 규범이나 윤리-모럴로서 말하는 의(義)는 아닙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의(義)는 단지 공동체 윤리의 관계 맥락 안에서만 비로소 의(義)라고 말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데리취(Delitzsch)라는 현대 성서주석가는 이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행위를 칭송하면서 “구약성서의 기준을 따르면 그녀는 분명 성녀(聖女)이다.”라고 결론지었던 것입니다. 구원 지향적이 아닌 그 어떤 흑백논리도 성서의 맥락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의가 아닌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 앞에서는 쉿! 흑백논리는 물러가라! 며느리 다말의 의(義)가 시아버지 유다의 불의(不義)를 이겼도다! 그러므로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의(義)는 찬양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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